언제부터였을까.
그 모든 이를 뒤로하고 방관하며,
초연히 홀로 걷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웃었다.
그러나 내 안의 나는 웃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힘겨운 재활치료를 끝마치고 얼마 남지 않은 퇴원소식에 들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검은 사람을 우리 집에 재울 거란다.
아무렇지 않게 그저 밥 먹자와 같은 표정으로 어미가 말한다.
까맣게 잊은 듯. 한 치에 망설임도 없이 지워버린 듯.
작은 배가 가라앉는다.
계속 계속 가라앉는다.
그렇지만 이내 다시 떠오른다.
기대가 없으면 슬픔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나는 울었다.
그러나 내 안의 나는 울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감춰오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을 무시한 채.
‘비밀’이라는 것을 들고, 혼자 달나라로 가버렸다.
그것이 나의 비밀일까, 너일까.
태양이 비춰 주지 않는 음지에 깊게 깊게 묻었다.
2011~2014 주희 노트 중에서
p10
왜. 이리도 뻔한 비극은 한 때, 한 시간에 오는 것일까.
언제 몇 번 와도 결코 질리지 않는 그것으로.
행복은 행복했던 그때라 부르는데.
비극은 날마다 다른 문자로 오늘이라 부른다.
생각해보면 행복했던 시간들도 많았는데
왜 나는 계속 비극과 쿨하게 안녕하지 못하는 걸까.
돌이켜보니, 전에 하고 싶던 것들은 오늘 날 다 끝마쳤는데.
끝내고 나니 또 다른 것을 하고 싶어 애쓰는 중이다.
나는 분명 지금 충분히 행복한데
지금 당장 이루지 못한 것들 때문에 힘겨워한다.
분명, 인생은 그리 다 행복하게 살 순 없는 것이다.
그저 짧은 비극이 끝나면,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재밌는 것이다. 분명히.
2011~2014 주희 노트 중에서
p86
“주희야.”
운전에 몰입하던 그가 주희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주희는 고개를 돌렸다.
“응.”
그는 얼마 없던 표정을 하곤 조금 크게 미소지었다.
“우리. 또 보자.”
주희는 남자의 밝은 얼굴과 제법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은 누군가로 하여금 아프게도 하고 누군가로 하여금 웃을 수 있게도 하는 것을 그 때에도 알았더라면. 주희는 비스듬히 웃고는 볼륨을 높게 올렸다.
p93
나는 열여덟, 열아홉, 스물까지.
조금 모자라서, 아파서, 나약해서,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버겁고 힘이 들어서.
누군가에게 때를 쓰기도 하고, 모두 다 내 잘못이라고 치부 해 버리기도 하고,나를 좀 봐달라고.
이런 내 마음에 곁에 있어달라고
응석부렸던 것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나에게 버릇처럼.
괜찮아. 창피해 할 것 없어.
오늘 알았으면 오늘 더 현명해진 거야.
괜찮아 한다.
오늘 날.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만 하는
막강한 권력의 정부는 지금
‘괜찮아’ 하세요?
2011~2014 주희 노트 중에서
p230
선생님. 행복은 내 안에서 오는 거죠.
이 세상은 계속 계속 바쁘고
높은 곳만 바라보라고 말하지만
높은 곳은 언제나 내 안에 있는 거죠.
선생님.
나는 지금 이 나라를 내려다봐요
그런데 왜 눈물이 나죠.
2011~2014 주희 노트 중에서
p244
재영은 거칠어진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런 게 올 거라고 믿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색이 파래져 되물었다.
“안 올 이유가 있어요?”
“여기… 우리 말고도 많이 있는데… 옆방 애들이랑 벽 두들기면서 살아있는지 서로 확인도 했어요.”
“아직 살아 있는 애들이 많아요!”
재영은 무언가의 울컥함이 치솟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당연한 권리. 저들이 들이미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의 순서가 오기까지의 당연한 기다림. 그것뿐이었다. 그 순간 재영은 찬물 때문에 얼어버렸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진심으로 자신이 어른이라는 사실이 이토록 창피할 수가 없었다. 재영은 조금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구하러 왔어. 나 말고도 많은 선생님들이 다른 애들을 구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 말 좀 따라줘.”
어느새 목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을 느끼며 재영은 밟고 있는 단단한 물체 위에 까치발을 들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구명조끼를 입은 친구를 붙잡고 간신히 차오르는 물 위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재영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학생은 재영의 어깨를 붙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하면 돼요?”
p252
너와 함께 그 많던 희망은 지나갔고, 더 이상의 슬픔도 그리움도.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은 것 만 같았다. 내게, 네게. 더 이상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주희는 마른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널 떠나보내지 못했다. 주희는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네가 돌아오지도 않았으니까. 주희는 표정 없는 얼굴로. 조금은 넉넉해진 체육관을 살폈다. 며칠 전만 해도 죽기 살기로 바다에 뛰어들려던 해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희는 가라앉은 얼굴로 긴 머리칼을 묶었다. 대통령은 그네호가 침몰한 뒤, 너무나 큰 잘못을 한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발표하고 정말 구조작업을 하는 중인 해경들을 해체시켰다. 주희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미친 여자라고 확신했다.
p294
“처음부터 에어 포켓은 없었대요. 우리가 항의하니까… 결국 보라는 식으로 넣은 건 공업용 오일이었대요.”
힘없이 말을 뱉는 남자를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남자가 말했다.
“해군과 해경청장이 모두 있었잖아요. 그 때 총리도 있었잖아요.”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지. 전부 다 쇼를 했던 거야.”
“그게… 그 새끼들이 사람이래요? 지네는 자식도 없대요?”
남자는 울컥 눈시울을 밝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슬프고도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자동차 배기가스를 마신 애들 보고 살아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으니. 난 정말 멍청했지. 그러고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니. 진짜 최악이네요. 아빠들.”
주희는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는 그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던 것일까. 무엇을 믿고, 무엇을 바랬던 것일까.
p295
“교육부 장관이 오십니다. 예의를 갖추세요.”
남자는 손을 떼어내며 황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주희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화도 안 나고, 우습지도 않고, 아무런 감정이 동요되지 않았다. 그저 낮게 ‘병신.’ 한 것도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부 장관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은 몇 명의 수행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장관은 남아 있는 가족들을 휘휘 둘러보곤 수행원 중 한 명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하며 의료용 의자와 탁자 앞에 앉는다.
호흡을 가다듬은 주희는 천천히 두 다리를 끌어안고 그를 바라봤다. 눈시울이 붉게 물든 가족들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교육부 장관을 바라보던 주희의 얼굴에 길게 늘어진 입가를 타고 느리게 흐르는 눈물. 주희는 수많은 눈물들이 흘러내리는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바라봤다. 자신의 수행원들과 의료용 탁자에 놓인 컵라면을 후후 불어 먹고 있는 교육부 장관을.
이후에 그 장관이 한 말 중 가장 큰 진실은
‘김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p296
(우리의 마음을 들어요.)
in the distance_ Hansol / Repetition _ Hansol
사랑하는 사람아.
조금만 더 견뎌줘 조금만 더 애써주면 돼
정말, 그거면 돼.
나의 마음이
거기 검은 바다 속만큼 까마득하진 않겠지.
거기 그 곳만큼 무섭지는 않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희망이 있어
너를 만나 너와 함께 그저 살아가고 싶은.
우리에겐 못다 전한 말이 있어
밤 새워 얘기해도 모자랄 만큼, 너를.
희망은 부질없다 말하는 이를 때려죽이고도 용서할 만큼,
너를. 사랑하고 있어.
p302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이길 포기한 자가 선장이라는 것이 아니라
비겁한 정부가 아니라, 무능력한 해경이 아니라
이 나라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모든 기관들의 무책임이 아니라.
죄 없는 몇 백 명의 국민들의 죽어도
몇 만 명의 국민들이 아우성을 쳐도
이 나라는
꿈속에서 깨어난 듯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 해결도, 아무런 결과도 없이.
이 나라는 끈임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런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2011~2014 주희 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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