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의 인화단결 철학의 진수가 드러난 일화가 하나 있다. 금성사가 만든 ?골드스타? 라디오가 날개 돋친 것처럼 팔려나가는 시절이었다. 당시 금성사 직원들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금성사는 럭키화학(LG화학)에서 만든 케이스를 납품 받아 라디오의 완제품을 생산 출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중남미로 수출한 1,000대 가까운 라디오 케이스가 모두 망가져 상품가치를 잃었다는 클레임이 접수된 것이었다. 큰 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특히 케이스 제작처인 럭키 측에서는 야단이 났다.
구인회는 즉각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전체 임원과 업무 관련 직원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회의실에 모여들었다. 구인회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이번 불상사가 일어나게 된 경위를 묻고 책임의 소재를 따졌다.
상대측 무역상의 주장은 금성사가 포장한 그대로의 화물을 비행기에서 하역한 후, 내용물을 꺼내보니 케이스가 모두 망가져 있더라는 것이었다.
책임이 무역상에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포장은 이쪽에서 했으니 제품 파손의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제품이 깨질 만큼 허술한 점이 있었다면 플라스틱 케이스를 만든 럭키 측에 잘못이 있는 게 아니겠느냐, 우리로서는 내부 회로 등 기능부분 이외는 책임질 일이 없다."
금성사 박승찬 전무의 의견이었다.
럭키 쪽에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케이스를 만든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규격품이지 불량품을 납품했던 건 아니잖은가. 더구나 몇몇 개가 깨졌다면 불량품이 끼어 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전량 파손이라면 절대로 케이스 탓이 아니고 제품 포장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완제품의 화물 포장은 금성사가 했으니 우리가 책임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다."
럭키 측 구자경(현 LG그룹 명예회장, 구인회의 장남) 전무의 주장이었다.
두 회사간의 의견이 평행선을 그으면서 논쟁은 의외로 심각했다. 언성이 높아졌다. 감정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더 이상 회의를 계속 할 수가 없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박승찬 전무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뜻밖의 상황에 다른 임원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구인회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구인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한 어조로 회의를 계속해 여러 가지 대책과 사후수습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고 그날 회의를 마무리했다. 방으로 돌아온 구인회의 심기 역시 편할 리 없었다. 이 생각 저 궁리 하던 끝에 구인회는 장남인 구자경 전무를 불렀다.
"봐라. 니가 싸워서 될 일이가? 양보할 건 하고 이해할 건 해야 되지 않냐 말이다. 럭키쪽에 잘못이 없다 해서 상대방을 그렇게 몰아붙여도 되는 거냐? 덕성 있는 경영자는 논쟁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인화를 생각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구자경 전무는 멋쩍어했다.
"우리 제품에 하자가 있었다면 감독을 소홀히 한 나에게 책임이 있제. 그러나 이번 일은 뭔가 낌새가 이상타 생각된다. 조사해 봐야 알 일지만 우리 물건의 값을 조정하려는 장난 아닌지 모르겠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니 자리에 가봐라. 내일은 이번 일에 대한 어떤 조치를 할 생각이다."
구인회는 다시 박승찬 전무를 불러들였다.
"보소, 그래 화내고 나가면 그만둘 작정이요?"
"그만두라 하시면 그만 두겠습니다. 도대체 금성사가 뭘 잘못했습니까."
"박 전무는 금성사가 잘못한 일이 없다는 것만 생각했지, 럭키도 잘못이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 일 없소? 본시 큰 그릇에 큰 물건 담는다 하지 않았소, 내 말 뜻을 알겠소."
구인회는 구자경 전무에게 했던 말을 박승찬 전무에게도 똑 같이 해주었다. 별도 조치가 있을 때까지 가서 사후 대책이나 세우라고 일렀다.
수출품 클레임과 관련하여 어떤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은 삽시간에 사내에 퍼졌다. 문책 인사가 있을 거라는 찬바람이 임직원들의 마음을 조이게 하는 가운데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직원들은 임원 보직발령 공고문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승찬 전무, 구자경 전무 두 사람 모두 일 계급 승진으로 부사장이 돼 있었다. 그런데 서로 자리를 바꾸어 박부사장은 럭키로, 구부사장은 금성사로 보직이 변경돼 있었다. 절묘한 인사였다. 자식이라고 두둔하지 않고 남이라고 괄시하지 않는 구인회의 포용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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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제품을 만들려면 직원을 최고 대우로 해줘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가 대구에 제일모직 공장을 건설할 때다. 이병철은 "모직은 고가품이므로 만드는 사람의 자질이 뛰어나고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먼저 최상급의 시설을 갖춘 여종업원들의 기숙사를 짓도록 지시했다. 쾌적한 환경 속에서 일하면 작업능률도 오르고 좋은 품질이 나온다고 확신했다.
1950년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스팀난방과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했다. 복도에 고급스런 회나무를 깔고, 또 나무도 심고 연못과 분수도 만들어 공장 전체를 잘 다듬어진 하나의 정원으로 꾸몄다.
당연히 임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병철은 흔들림 없이 거듭 자신의 지시대로 할 것을 강조했다.
"돈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길게 보면 그게 다 사회에 대한 봉사요, 여직원의 능률이 오르면 그만큼 생산비가 싸질 것이고, 제품의 생산원가도 낮아질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해서 공장 건물 중 가장 먼저 완공된 것이 여직원 기숙사였다.
병철의 마음을 새롭게 한 것은 일본 유학시절 읽은 호소이 와기조의 '여공애사(女工哀史)'라는 소설이었다.
"비참한 노동조건 하에서 일하는 방적공장의 참담한 여공생활을 그린 것이었는데, 그 당시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 공장은 그래서는 결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그들이 숙식할 기숙사에는 최상급의 쾌적한 시설을 갖추도록 하자. 이렇게 굳게 마음먹고 스팀난방을 설치했다."
이병철이 최고의 시설을 갖춘 기숙사를 지으려 했던 진짜 이유였다. 『삼성 60년사』에 당시 제일모직에 근무했던 한 직원의 기숙사와 관련된 생생한 글이 실려 있다.
"기숙사 주변은 갖가지 꽃과 나무로 가득한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가족들이 면회 오면 우리는 정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곤 했다.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가 따로 있었고, 전속 사진사도 있었다. 건물 안에는 미용실, 세탁실, 목욕실, 다리미실, 도서실 등이 갖춰져 있었다. 목욕탕은 24시간 개방돼 있었고, 한꺼번에 200~300 명이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였다. 기숙사에서는 교양 함양을 위해 저녁에는 외부에서 교사를 초빙해 영어와 수학, 한문 등 교양강좌를 열어주기도 했다."
이후 제일모직이 사원대우를 최고로 해준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여직원 모집공고가 나자 제일모직에 입사하려는 여성들로 공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삼성그룹에는 한때 이사 대우의 운전기사가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병철의 자가용 운전기사였던 위대식씨다. 6.25가 터졌을 때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이병철은 인공 치하의 3개월 동안을 위씨의 다락방에서 숨어 지낸 적이 있었다. 위씨는 그때 자전거로 서울에서부터 삼성물산 창고가 있는 인천까지 오고 가면서 이병철에게 돈을 구해다 준 것으로 유명하다.
돈을 구해온 과정이 드라마틱하다. 위씨는 당시 삼성물산공사의 창고를 지키고 있는 인민군에게 뇌물을 주고 물건을 빼내 팔아 암달러 시장에서 달러로 바꿔 이병철에게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인공 치하에서 인민군에게 뇌물을 주고 물건을 빼내는 행위는 발각되면 총살감이다. 그런데 위씨는 물건을 팔아 달러로 바꿔오면서 자신의 상사인 이병철을 모셨다.
이병철은 위씨가 구해온 달러를 받을 때마다 호되게 야단을 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흐뭇했다. 그때 위씨가 마련해온 돈은 빈털터리가 된 이병철 일가와 삼성물산공사의 임직원들이 피난 갈 때 소중하게 쓰이게 됐다. 그러한 인연으로 위씨는 이병철의 운전기사 생활을 30년 이상 계속했다. 이병철은 그에게 이사급 대우를 해주면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준 의리에 보답했다. 이병철은 업무에서는 비정하고 냉혹할 정도로 차갑다는 평이다. 하지만 한번 맺어진 인연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의리와 신의를 존중하는 덕장의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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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란 있을 때 아끼는 것이지, 없는 돈을 제 아무리 아낀들 무슨 소용인가. 손안에 있는 돈은 안 쓰고 모으는 것이 곧 버는 길이며 돈을 아끼자면 돈으로 바꾸는 물건 또한 돈처럼 아껴야 한다."
구인회의 셋째 아우 태회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던 이듬해였다. 구인회는 고향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진주로 내려갔다. 진주 유지들은 진주가 배출한 당대의 거물 경제인이 고향을 찾았다 해서 그를 만나기 위해 다방에 모였다.
고향 마을 승산의 소식은 물론, 포목상 하던 시절의 추억담으로 시작하여 최근의 총선거로 이어진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자리를 바꾸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식사가 끝나고 구인회가 먼저 일어서 계산대로 가서 돈을 냈다. 유지들을 황급히 가로 막으며 돈은 이미 낸 뒤였다. 그런데 구인회가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이었다. 거스름 돈 5환을 받기 위해서였다. 다방 아가씨가 서랍을 뒤졌지만 잔돈은 보이지 않았다. 그 아가씨는 잔돈을 바꿔 오겠다며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구인회는 카운터 앞에 서서 기다렸다. 구인회가 서 있자 등 뒤에 늘어선 진주 유지들은 하릴없이 어색한 표정으로 5환이 빨리 올라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거지도 안받아 간다는 돈 5환을 거슬러 받기 위해 럭키그룹 총수가 수많은 지방 유지들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윽고 아가씨가 되돌아와 거스름돈을 건네주자, 구인회는 5환을 받아 지갑 속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이일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하지만 구인회는 일제 말기에는 독립자금으로 거금 1만원을 두말없이 내놓는 인물이었다.
메모 1 : 이병철은 정말 사원 면접 때 역술인을 배석시켰나?
메모 2 : 정주영 회장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메모 3 : 창업주의 띠와 경영스타일
메모 4 : 회사 이름은 누가 어떻게 지었나?
메모 5 : 아침형 인간, 오다 노부나가와 인간 정주영
메모 6 : 재계의 청와대로 불린 삼성그룹 비서실
메모 8 : 두산그룹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전문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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