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회담이 시작되기 전인 1951년 6월 13일 마오쩌둥은 “휴전을 위한 조건으로 38도선에서 경계선을 복구하며 북한과 남한으로부터 일부 지대를 중립지대로 설정하는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해 6월 23일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 대표도 정전을 제안하면서 “조선 문제를 화평적으로 해결하는 첫째 절차는 교전쌍방이 정화(停火)와 휴전을 담판해야 하며 쌍방은 38도선에서 군대를 철퇴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1951년 7월 10일 첫 회의에서 남일(南日) 공산 측 수석대표는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하고 쌍방의 무장부대는 동시에 38도선에서 10킬로미터를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 pp.16~17
해상 분계선이 정전협정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1953년 8월 30일 유엔군 사령관은 남북한 무력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북방한계선을 설정했다. 이 선은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정전 후 정전협정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설정한 이래, 남북한의 실질적인 해상 경계선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 측은 이미 1973년 12월 1일 제346차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정전협정 어느 조항에도 서해의 해면에서 ‘계선’이나 ‘정전해협’이라는 것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며, 서해 5도의 수역을 포괄하는 이 해면은 자신들의 영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연해에서 그들의 해군 함선들이 자유로이 항해하는 것은 정상적이라면서, 앞으로 서해 5개 도서의 해상 출입 시 북한 측에 신청하고 그 승인을 받으라고 주장했다. --- p.50
전쟁 중 공산 측의 시기별 유엔군 포로의 규모는 전쟁 중 북한 인민군 총사령부의 보도나, 혹은 김일성이나 박헌영 등의 보고에 따르면 첫 6개월간의 포로 3만 5,000명과 3개월 후의 2만 6,868명을 더하여, 9개월간 총 6만 5,868명이었다. 이 통계는 북한의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되어 정전협상에서 포로 규모를 추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유엔군은 휴전협상에서 이를 토대로 이후 사라진 국군 포로 5만 명을 줄곧 제기했다.
하지만 1951년 6월 25일 전쟁 1주년을 맞이하여 인민군 총사령부는 한국군을 비롯한 유엔군 59만 8,567명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으며 포로로 했고, 그 가운데 포로가 10만 8,257명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북한에서 밝힌 최대 규모로 중국군 창건 24주년 축하 기사와 김일성의 8?15 해방 6주년 기념 보고에서도 재확인되고 있다. 이 규모는 전과를 선전하기 위한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북한 정부가 공식 발표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포로의 숫자를 확인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p.65
협정 체결 당시 한국군 대표가 빠진 이유는 우리 정부가휴전을 반대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는 정전에 서명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의 합의에 도달했다는 확신을 심어 준다면 정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한국군이 정전협정의 체결에 불참한 것은 전후 북한 측으로부터 한국은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빌미가 되었다. 북한이 1974년 이후 평화협정 대상으로 미국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러한 미국과의 평화협정은 주한미군 문제를 포함시키고 한국과 중국을 배제하는 등 추진 과정에 논란이 많다. --- p.91
정전협정에는 남북한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한강 하구 공동관리 등이 규정되어 있다. 한강 하구는 쌍방이 자유통행권을 허용한 수역이나, 실제로 하구를 통행한 경우는 1990년 11월 자유로 개설 자재?장비 운반을 위한 준설선과 예인선 항행과 2005년 11월 한강 전시용 거북선 모형선 항행 등 4차례에 그쳤다. 그러나 이 지역을 비롯해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를 위한 모색은 계속되었다.
2002년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고, 급기야 2005년 2월 10일 핵 보유 선언과 6자회담 무기한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북핵 위기가 전면에 재등장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2005년 6월 대통령 특사로 북한을 방문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6자회담 복귀와 제2차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 이때 서해상 긴장 완화와 남북 공동의 경제 이익을 위해 서해상 공동어로, 북한에 대한 송전 등을 제안했다.
--- p.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