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해요, 어서 받지 않고. 무거워 죽겠는데.”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우현을 보자 하빈은 액자를 내려놓고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이 집의 가훈이 될 거예요. 그러니 조심조심 다뤄요. 그리고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놓고.”
액자를 받아 거실에 내려놓는 우현을 향해 하빈은 설교하듯 말하고 있었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급하게 썼는지 삐뚤삐뚤한 글씨로 된 액자에선 방금 만들었는지 냄새조차 가시지 않고 있었다.
“찔리죠?”
“그렇게 할 일 없는 인간처럼 보였나?”
우연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좀 크게 웃어봐요. 뭐, 그렇게 보일 듯 말 듯 웃는지. 얌전한 새색시가 따로 없다니깐. 하여튼 그렇게 멀뚱 있지 말고 어서 박지, 뭐 해요!”
하빈의 재촉에 우현은 얼떨결에 집 안을 주섬주섬 뒤지고 있었다.
“못하고 망치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분명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우현은 왠지 혼이 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한테 이런 투의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언제나 경계심이 가득하거나 조심스러운 말투 아니면 협박……. 그는 생소한 느낌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도리도리 젓고 있었다.
“미쳐!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를 수가 있지? 그럼 당장 나가서 사와요!”
하빈은 액자를 빼앗더니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명령하듯 하고 있었다. 우현은 그런 그녀의 말에 얼떨결에 나가고 있었다.
‘귀여운 면도 있네? 왠지 어리버리한 것도 같고.’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자신의 말대로 행동하는 그의 태도에 하빈은 의외란 듯 웃음이 나왔다. 처음 봤을 때는 너무 무심한 것만 같던 이가 점점 시간이 갈수록 재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당황한 모습은 언제나 하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내가 사드 경향이 있었나? 몰랐네. 그건 그렇고, 정말 더 이상 저러고 있는 것은 진짜 못 보겠네. 이판사판이지, 뭐. 성격 보니까 거절할 인간도 못 되는 거 같은데 밀어붙이면 어쩔 거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지?”
그 말이 신호였을까. 하빈의 마음이 풀리며 날카로워져 있던 눈길이 부드러워졌다.
“일을 해야죠.”
하빈의 목소리는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흥분되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단호하게 결론을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우현은 하빈의 도발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것을 바라고는 일부러 상황을 몰아간 것이었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런 그녀의 잔머리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부러 그런 건가? 눈물도?”
우현의 직설적인 질문에 하빈은 속으로 찔리고 있었다. 얼떨결에 하다 보니 감정이 솟구쳐서 오버를 하긴 했지만, 이왕 몰아붙인 것 자연스럽게 끝까지 몰아가는 것이 나았다.
“일부러는 아니에요. 하다 보니 울컥한 거지.”
“그럼 지금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릴 것 같지?”
“당연히 일을 하시겠죠.”
하빈은 일말의 의심도 없다는 듯 말했다.
“이유는?”
“저를 책임지시겠다면서요. 그럼 일을 해서 경제력을 가져야지, 말로만 그러실 거예요?”
“허허허, 당했군.”
우현의 너털웃음에 하빈은 그가 결심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을 하실 거예요?”
“글쎄, 너무 난데없이 튀어나온 이야기라.”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잖아요.”
“하고 싶은 일이라…… 글쎄.”
“그럼 뭔가 해볼 만한 것도 없어요?”
시큰둥한 반응에 하빈은 계속 질문을 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우현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어린 시절에…….”
우현은 아무래도 말을 꺼내기가 어색한지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하빈은 어서 말을 하라는 듯 재촉하는 얼굴로 우현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음, 탐……정 어떨까?”
우현은 힘들게 말을 꺼내며 하빈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저, 지금, 탐,정,이라고 하셨나요?”
“나 아저씨 좋아요.”
열에 들떴나 보다. 하빈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 깊숙이 감춰두었던 말이 절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
“사랑하나 봐요.”
우현의 침묵에 하빈은 다시 한 번 말하고 있었다. 평생 숨겨야 할 것 같았던 말이 목구멍을 뚫고 자기 마음대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가 들진 않았다.
“열이 심한 것 같다.”
하빈은 똑바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진실했고, 정직했다. 긴장했는지 그녀의 몸은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우현은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쳐다볼 수가 없어 눈을 피하며 말을 돌리고 있었다.
“피하지 말아요. 비겁해요. 최소한 여자가 먼저 고백을 했으면 ‘예스’다 ‘노’다라고 말해 주세요.”
누워 있던 하빈은 서서히 일어나 앉으며 마주 보고 있는 우현의 얼굴을 감싸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
“난 안 되나요? 아저씨 눈에는 서하빈이란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직 아버지만 보이나요?”
따뜻하며 조그맣고 부드러운 손길이 우현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우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그녀의 손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살며시 키스를 했다.
“손등에 하는 것은 여자인 너를 지키겠다는 언약.”
그리고는 살며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이마에 하는 것은 그를 대신해 너를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
그의 머리카락이 보이며 하빈의 볼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볼에 하는 것은 친구처럼 언제나 옆에 있겠다는 서약.”
그리고 그는 살며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발등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바치겠다는 맹세……. 미안하다,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이다.”
우현은 차마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떨리는 눈망울. 그리고 따뜻하지만 서글픈 그의 눈빛. 하빈은 얼굴에 느껴지는 그의 부드러움과 애틋한 입술의 감촉을 느꼈다. 예상은 했지만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겨우 눈물을 참으며 그녀는 애써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현과 같이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자세를 약간 높이더니 갑자기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