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나키스트적 사시에는 정치, 투쟁, 토의, 그리고 그런 것들에 따라붙는 영구적인 불확실성과 학습에 대한 옹호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내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많은 아나키스트 사상을 지배했던 공상적 과학주의utopian scientism의 주요 흐름을 거부한다는 것을 뜻한다. --- p.12
질서, 합리성, 추상성, 이름 일람표의 종합적인 명료성, 풍경landscape, 건축술, 작업 공정 등은 위계권력에 도움이 된다. 나는 그런 것을 ‘통제와 유용流用의 풍경’으로 여긴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대대로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거의 보편화된 시스템은 그것이 신원확인을 하는 데 쓸모 있다는 사실을 국가들이 알아채기 전에는 지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스템은 세금, 법정, 토지재산, 징병제, 경찰활동과 더불어, 즉 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확산되어왔다. 이제는 개인식별번호, 사진, 지문, DNA 검사가 그 역할을 대신하지만, 어쨌든 그런 시스템은 감시와 통제의 수단으로 창안된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기술들은 체제의 적을 체포하려 할 때 백신을 놓는 것만큼이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총체적인 능력을 뜻한다. 그런 기술들은 지식과 권력을 집중시키지만, 그것들과 관련된 목적에는 극도로 무관심하다. --- p.75~76
어느 의미에서 학교는 산업화되고 있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계산 기술과 읽고 쓰는 능력을 훈련시켜주는 공장이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어려운 시절Hard Times』에 등장하는, 계산에 아주 밝고 툭하면 악을 쓰면서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교장을 우스꽝스럽게 상징화한 이름인 그래드그라인드(Gradgrind, ‘현실에 밝은 정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우리에게 공장을 떠올려주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틀에 박힌 업무(수업), 엄격한 시간 규율, 권위주의, 군대식 시각 질서, 자그마한 어린 노동자들의 의기소침함과 나름대로의 저항이 존재하는 공장을.
물론 보편적인 공교육은 산업이 요구하는 노동력을 배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 기관임과 동시에 정치적 기관이기도 하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언어의 지역적이거나 지방적인 정체성, 민족의식, 종교를 뛰어넘는 애국적인 시민을 배출하도록 설계되었다. 혁명기 프랑스의 보편적universal 시민권은 전 국민universal 징병제와 짝을 이뤘다. 학교 시스템을 통해서 그런 애국적인 시민들을 제조해내는 일은 명시적인 커리큘럼을 통해서보다는 교육할 때 쓰는 언어, 표준화, 군대식 편제를 닮은 훈련, 권위와 질서를 통해서 더 잘 이루어졌다. --- p.120~21
분석적 지성 테스트에서 좋지 않은 점수를 얻은 이들이 학교 시스템이 높이 평가해주지 않거나 아예 가르쳐주지도 않는 많은 지성 형태들 가운데서 한 가지나 몇 가지의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재능들을 사장시키고 그 학생들 중에서 5분의 4를 사회의 문지기들이 보기에나 본인 자신들이 보기에 영원한 낙인이 찍힌 존재들로 보이게끔 만들어서 사회에 내보내는 시스템은 대체 어떤 종류의 시스템이란 말인가? 너무나 많은 사회적 손실과 낭비를 빚어내는 이런 교육학적 시야 협착증에 의해서 ‘분석적 지성을 갖췄다고 하는 엘리트들’에게 부여해주는 특권과 기회들의 그 수상쩍은 특혜는 대체 뭐란 말인가? --- p.124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가장 현대적인 생활 세계 조직들(가족, 학교, 공장, 회사, 작업장)의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특성은 온건한 형태의 시설 신경증을 빚어내는가? 우리는 많은 기관들의 연속체 한 끝에 구성원들의 자율성과 진취성을 수시로 짓밟는 전체주의적 기관을 배치해놓을 수 있다. 이런 연속체의 다른 한 끝에는 아마도 자기 행위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빚이 없고 기관 관리자들에게 비굴하게 굴어야 할 이유가 없는, 독자적이고 자족적이고 자긍심 있는 자영농들과 소기업 경영자들로 이루어진 제퍼슨식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버전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제퍼슨은 그런 독자적인 농민들이야말로 시민들이 두려움이나 치우침 없이 자기네 의사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활발하고 자주적인 공론장의 기반이 된다고 생각했다. --- p.133
좀 더 폭넓게 볼 때 가부장제적 가족과 국가, 그 밖의 위계조직들 내에서의 생활이 빚어낸 누적 효과들이 아나키즘의 이론과 자유민주주의 이론 양자 모두가 찬양해마지 않는 자발적인 상호관계의 능력이 결여된 수동적인 신민을 길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공공정책을 통해서 자주성과 자율성, 시민적 자질을 증진시켜주는 조직을 하루빨리 육성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의 획일적인 생활세계를 적절히 조정해줌으로써 그런 세계가 민주적 시민됨의 자질과 좀 더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p.133~34
역사의 압축과 요약, 선명한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욕구, 엘리트의 필요성, 통제와 목표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주입하려는 조직은 일치단결하여 역사적 인과관계의 거짓된 이미지를 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리는 그런 요소들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이 혁명 정당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이고 즉흥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모험주의적인’) 행위들이 한데 모아진 결과로 일어난 것이고, 조직화된 사회 운동들은 조직화되지 않은 항의와 시위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인 경우가 많으며, 혁명이나 사회 운동이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신장시켜주면서 안겨준 엄청난 이익은 제도화된 질서정연한 절차의 결과물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사회질서를 깨부수고 나오는 무질서하고 예측할 수 없고 자연발생적인 행위들 덕에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 p.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