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은 해빈은 신발을 벗으려다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비를 맞았는데도 새신인 것 마냥 고급스러움이 풍기는 그녀의 단화와 비에 젖어 더할 나위 없이 보잘것없는 그의 낡은 운동화. 한 켤레밖에 없는 운동화라 매일 신어야 해서 빨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더욱 볼품없고 초라해 보인다. 마치 지금 자신의 모습처럼. “……저기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해빈의 다리를 잡아끌었다. “운동화 끈을 너무 꽉 묶었나 봐요.” 자격지심 같은 건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해빈은 건성으로 이마를 긁으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저기, 나 먼저…… 씻어도 되죠?” “편할 대로 해요.” 객실 안의 온도가 높아서인지 그녀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곱게 개켜져 있는 가운 하나를 챙겨들고 욕실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욕실의 문이 닫히고 샤워기의 물줄기가 바닥을 치는 소리를 들으며 해빈은 반짝이는 야경이 펼쳐져 있는 창가로 다가섰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가만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여자를 향해 보였던 수줍으면서도 어색한 미소 같은 건 사라져 있었다.
「네 엄마와 동생을 부탁한다. 날 용서하지 마라.」
잊었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유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용서는 하라고 해도 절대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부탁은 들어주고 싶지 않아도 당연히 해빈이 떠안아야 할 몫이었다. 망할 일은 없을 거라고 모두가 호언장담하던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던 아버지. 재벌은 아니었지만 풍족한 삶이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망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막지 못한 어음들이 늘어가고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아버지는 사채에 손을 대셨고 결국 네 가족은 방 한 칸 얻을 돈도 남기지 못한 채 길거리로 내몰렸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건 해빈뿐이었다. 아버지는 재기의 발판으로 도박을 선택했고 어머니는 당신의 사치벽을 손에서 놓지 못하셨으며 동생은 제 손에서 빠져나간 재력을 그리워하는 것에만 시간을 낭비했다. 결국 결론은 아버지의 자살. 그나마 친가와 외가 쪽에서 힘을 모아 마련해준 자금을 카지노에서 탕진한 아버지는 죽음으로 죗값을 치루셨고 그때부터 해빈은 가장이 되었다. 그때 해빈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부익부……. 빈익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해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발바닥이 갈라지도록 일을 해도 가난은 사라지지 않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동생의 합의금과 어머니의 명품 사랑에 치여 해빈은 허덕이고 있었다. 서울의 아경은 이다지도 아름답건만. 이 세상에는 평온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고 많을 텐데. 이제는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에게 돈을 받고 성관계를 가져야 하는 인생을 살게 되다니. 달칵. 자신의 인생이 어디까지 막장으로 흘러갈지 셈하고 있던 해빈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아…….”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선 그는 눈만 깜박였다. 여자라는 생명체는 원래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인가? 하얀 가운을 입고 나온 여자는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은 다소곳하게 귀 뒤로 넘겨져 있었다. 그래서 앙증맞은 귀에 통통한 귓불이 눈에 쏙 들어왔다. 얼굴 만면에 퍼져 있는 홍조와 부풀어 오른 입술에 새겨진 주름마저도 예쁘게 보였다. 그의 시선이 불편한지 자꾸만 가운의 앞섶을 여미는 여자의 행동 때문에 으레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선이 가는 여자에게는 너무 커 보이는 가운. 그사이로 비치는 가슴골이 해빈의 심장에 주먹을 날렸다. “씻을…… 래요?” 혹시 그녀가 미친 듯이 뛰어대는 제 심장 소리를 듣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던 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급하게 가운을 챙겨들고 욕실로 들어선 해빈은 후각을 마비시키는 달콤한 향에 휘청거렸다. 여자를 오래 기다리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과 다른 때보다 신경 써서 씻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하던 그는 가글을 세 번이나 하고서야 헛기침을 하며 욕실 문을 열었다. 여자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깍지 낀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제 손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여자는 해빈이 다가가서 앞에 서자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기회는 있어요.” 돈에 상관없이 이 여자를 안고 싶다는 마음까지 생겼으면서도 해빈은 끝까지 자제심을 발휘했다. 한 여자의 잘못된 선택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 여자의 원망의 대상이 되어버리면 마음이 좋을 것 같지가 않으니까.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해빈을 올려다보던 여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여자는요. 겨울에 술 취해서 길거리에 엎어져도 얼어 죽지를 않는대요. 왜인지 알아요?” “왜요?” “남자들이 업어가니까.” 담담하게 말을 잇는 여자의 앞에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해빈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요. 얼어 죽을 것 같아.” 그녀의 손등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스무 살에 약혼해서 6년이나 옆에 있었는데……. 나는 아직 첫 키스도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는 그동안에 매번 그 품에 안겼대요. 나한테는 없는 매력이 그 여자한테는 있는 걸까요? 나도 두근거릴 수 있고……. 나도 떨릴 수 있고……. 나도, 나도 여자일 수 있는데…….” 흐느낌 없는 담백한 음성이었지만 손등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옆으로 흘러 가운을 적시기 시작했다. “여자일 수 없어서 죽고 싶은 마음, 모르죠? 그 정도 지위와 배경을 가진 남자들은 한 번쯤 그럴 수 있다고 날 설득하려고 하는 부모님 앞에서 막막해지는 마음, 절대 모를 거야.” 해빈은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남자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를 약혼녀로 두고서도 다른 여자를 안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딸을 가진 부모가 그런 남자를 용서하라고 설득한다? 다른 의미로 본다면 이 여자는 최해빈 못지않게 처절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난…… 여자이고 싶어요. 그런데 더 이상은 그 사람한테 여자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날, 여자로 만들어줄래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보게 된 눈동자. 해빈 자신이 비치는 맑고 투명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이 여자를 안아야겠다. 이 여자를 안아줘야겠다. 그녀가 보이는 간절함과 애절함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해빈은 강심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그의 손은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있었다. 행여나 자신의 거친 손에 그녀의 피부가 상할까 걱정하면서. “이제…… 집에 가란 말, 안 할 거죠?” 또르륵. 또 한 방울 굴러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던 해빈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