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받아줘. 내 사랑을 외면하지 말아줘. 서현아, 너도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라.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해줘. 너 없이는 살 수 없는 날 버리지 마!’
서현이 그를 사랑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친구로 지내도 된다고 했던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서현의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그는 자신의 마음이 거짓이었음을 확인할 뿐이었다. 간신히 끌어낸 용기가 갈망과 절망 사이를, 욕심과 순수함 사이를 오가며 끝없이 추락했다.
‘서현이가 받아주지 않으면, 친구라서 사랑할 수 없다고 하면 어쩌지? 왜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아무도 모르게 마음에 묻어버리지 왜 말을 꺼냈느냐고 원망하거나, 불편해서 앞으로는 친구도 할 수 없다고 하면 어쩌지? 더 이상 나를 만날 수 없다고,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쩌지?’
간신히 멀찍이 떼어놓았던 원초적인 불안이 마음을 사정없이 흩뜨렸다. 흩든 마음을 초조하게 추스르고 있을 때, 서현이 갑자기 테이블 위로 쓰러지는 모습을 그는 보고 말았다.
마음이 급했다. 고백은 나중 일이었다. 준희 혼자 힘으로 서현을 돌보기 버거울 거라는 생각보다, 되도록이면 빨리 서현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오피스텔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일초라도 빨리 서현을 편히 쉬게 해주어야 했다.
영빈은 급하게 차에서 나와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그가 입구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준성이 서현과 준희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준성까지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머쓱해서 그는 결국 그녀를 데려다 주는 것을 양보했다. 대신 약국을 찾아 정신없이 차를 몰았다.
그가 그토록 기다렸던 고백을 남겨놓은 채, 서현은 다시 잠이 들어버렸는지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 후부터 무수한 밤들을 뜬눈으로 지새웠던 그에게 오늘 밤은 최고로 특별한 날이다. 그가 오늘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면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라 행복해서이므로.
술김이든, 잠꼬대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의 감정이 이미 오래전에 변한 것처럼 서현의 마음도 변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 주위가 뜨거워졌다.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그를 사랑한다는 서현의 말에 그의 심장은 이미 용광로가 되어 있었다.
이미 변해버린 마음을 끌어안고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서현에게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나도 널 사랑한다고, 우린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그녀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이 세상을 향해, ‘정서현은 김영빈의 여자다!’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었다.
“사랑해, 서현아. 네가 날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널 사랑해. 아주 오래전, 그날 빗속에서 너한테 말했었지? 내가 널 지켜주겠다고! 그때부터 널 사랑했어. 아니, 네가 아주머니의 배 속에 처음 생명으로 존재한 그 순간부터, 내가 우리 엄마 배 속에 자리 잡기 이전부터 이미 널 사랑했는지도 몰라. 사랑해, 서현아. 너를 사랑해. 너만을 사랑해.”
영빈은 서현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작은 속삭임이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그의 사랑이 서현의 마음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품고 있어서 그를 애달프게 만들었던 고백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물 흐르듯 빨려 들어갔다.
서현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감겨진 눈꺼풀 위로 눈동자의 움직임이 보였다.
“서현아, 내 말 듣고 있니? 나, 널 사랑해. 친구이기 이전에 여자인 널 사랑해. 이젠 친구가 아닌 남자로 네 옆에 있고 싶어. 남자로서 널 사랑하고 아껴주고 싶어. 네 남자가 되고 싶어. 그러니까 서현아, 네가 내 여자가 되어줘. 널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응?”
“으음.”
눈동자의 움직임이 멈추고 서현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꿈을 꾸는 듯,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동안 멍하니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침묵과 정적. 길게 이어지는 고요를 어렵게 참아내던 그가 마른침을 삼켰을 때였다. 서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매트리스가 그녀의 눈동자만큼 출렁였다.
“너…… 였니? 지금 나한테 말한 사람이……, 너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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