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클라마칸의 누런 사구들은 마치 굳어버린 바다의 거대한 파도처럼 먼 지평선까지 수도 없이 솟아 있고, 여기저기에는 유난히 커다란 모래 언덕, 말하자면 자기 동료들 위로 머리를 내민 사구의 왕과 같은 것도 눈에 들어온다. 이것들은 과거에 수도 없이 그래 왔던 것처럼 여행자들을 삼켜버리겠다고 침묵 속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고대 한나라때의 기록에 의하면 2천 년 전 중국인들은 타클라마칸 - 투르크어로 들어가면 당신은 나오지 못하리라라는 뜻 – 을 ‘움직이는 사막’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쉬지 않고 사막을 할퀴는 바람으로 인해 누런 사구가 항상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수로학자나 기후학자들은 만년설이 녹아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의 이름을 따서 타림 분지라는 보다 점잖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강은 롭 노르란 호수로 흘러들어가는데, 이 방황하는 호수의 수수께끼는…..
--- p.26,---p.30-31
'중앙아시아의 유물은 중앙아시아민들의 것이라는 전제가 새롭게 세워져야 마땅하다.' '초기 불교문화에 속한 고대 필사본, 프레스코와 유물들은 투르크스탄 전역을 다니며 어떻게 실어나갔는가에 대해 기술한 외국 탐험가들의 저술을 중국인들이 읽을 때마다 그들은 끓어 오르는 분노로 몸을 떤다'
--- p. 9,15
이런 문화재 파괴 행위에 대한 윤리적 소감을 말하라면, 주저없이 이 장소를 훌렁 벗겨가 버리고 싶다는 것이다. 러시아 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 또 중국 군대가 이곳에 숙영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더 나쁘게는 모두가 예감하고 있는 무슬림 반란도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것 아닌가? 아마 20년 후에는 이 장소는 방문할 가치도 없게 될 것이다.
--- p.317
스타인은 펠리오가 먼저 누란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친구에게 썼다. '솔직히 난 그 프랑스인이 거기 먼저 가 있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네. 3년동안 옥스퍼드 대학과 대영박물관에서 동양고고학,동양언어들을 연구하면서 보냈는데, 이때 중국어를 공부하지 않았다 이 약점으로 인해 20년 후 그는 돈황의 천불동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 p. 106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들은 모두 과거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혹심한 고통과 위험을 각오하였고 필요하다면 아시아의 이 험악한 오지에서 목숨을 희생할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들을 이 혹독한 겨울과 찌는 듯한 여름의 타클라마칸으로 인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 p.32
.... 그 수집품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가 된 주된 원인은 오타니가 갑자기 재정압박에 시달리면서 방대한 양의 유물이 수장된 자신의 저택을 처분해 버린 데 있었다. ....... 그 뒤 이 부호는 조선의 채광권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조선총독부를 통해 유물들을 서울의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오타니 백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소유의 유물을 수용할 장소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전시할 공간이 없어서인지 많은 양을 만주의 여순 총독에세 제공해, 그곳의 박물관에서 전시하도록 했다. ....... 이제 그것들은 모두 어떻게 됐을까? 서울의 유물은 박물관의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뀐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 잘 보관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60여점의 프레스코와 프레스코 단편이다. 1945~1970년까지 이 박물관의 관장직을 맡았던 김재원 박사는 서울의 벽화가 베를린과 델리의 것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수집품이라고 말한다. 박물관에서는 특별 진열실을 만들 장기 계획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르콕보다 평화를 애호하는 인간의 심성을 덜 확신하고 있는 까닭인지, 벽화들을 옛 베를린의 박물관에서처럼 벽에 고착시키지 않고 이동 가능하도록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 p.335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들은 모두 과거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혹심한 고통과 위험을 각오하였고 필요하다면 아시아의 이 험악한 오지에서 목숨을 희생할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들을 이 혹독한 겨울과 찌는 듯한 여름의 타클라마칸으로 인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 p.32
.... 그 수집품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가 된 주된 원인은 오타니가 갑자기 재정압박에 시달리면서 방대한 양의 유물이 수장된 자신의 저택을 처분해 버린 데 있었다. ....... 그 뒤 이 부호는 조선의 채광권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조선총독부를 통해 유물들을 서울의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오타니 백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소유의 유물을 수용할 장소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전시할 공간이 없어서인지 많은 양을 만주의 여순 총독에세 제공해, 그곳의 박물관에서 전시하도록 했다. ....... 이제 그것들은 모두 어떻게 됐을까? 서울의 유물은 박물관의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뀐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 잘 보관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60여점의 프레스코와 프레스코 단편이다. 1945~1970년까지 이 박물관의 관장직을 맡았던 김재원 박사는 서울의 벽화가 베를린과 델리의 것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수집품이라고 말한다. 박물관에서는 특별 진열실을 만들 장기 계획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르콕보다 평화를 애호하는 인간의 심성을 덜 확신하고 있는 까닭인지, 벽화들을 옛 베를린의 박물관에서처럼 벽에 고착시키지 않고 이동 가능하도록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