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학자, 수필가로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으며 성균관대학교와 같은 대학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프랑스 정부 초청으로 프랑스에서 수학했으며 상명여사대(현 상명대) 불어교육과 교수(1961~19882), 숭실대 교수로 이화여대, 성균관대, 한양대 중앙대, 인천대 등에서 강의했다. 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으로 두루 일했으며 번역문학상(1987)과 한국수필문학상(1994)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나나》, 《목로주점》, 《팡세》, 《포화》, 《프랑스 콩트선》, 《에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클로버의 회상》, 《영혼의 새벽》,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뒤따른다》, 《첫맛과 끝맛》, 《종이배를 접으며》 《꿈과 꿈》, 수필 이론서 《새로운 에세이 작법》 등을 남겼다.
바로 그 순간 무대 안쪽의 구름이 갈라지며 베누스가 나타났다. 나나였다. 열여덟 살 치고는 상당히 숙성하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하얀 웃옷을 입은 여신 모양에 어깨 위로 긴 금발을 풀어 헤치고 관객들에게 웃음을 던지며, 침착하게 풋라이트 쪽으로 내려오더니 아리아를 노래하기 시작했다.-28쪽
최초의 착실한 남자에게 깨끗하게 버림을 받고, 수상한 남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넘어간 창녀, 신용거래를 거절당하고, 추방에 위협되는 인생행로의 다난한 출발, 신통치 않은 인기, 그런 것을 느끼게 하는 방이었다.-49쪽
“하룻밤 밤새껏 푹 자고 싶어요. 밤새껏 단 혼자서 말예요. 난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뿐이라니까요!”-80쪽
여자들은 그의 금고를 말려 놓는 것으로서 도덕을 위하여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134쪽
슈미즈처럼 가볍게 주름 잡힌 하얀 얇은 비단옷을 걸치고 취기로 파리해진 얼굴에 눈마저 거슴츠레한 나나는 순한 계집애 모양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뒷머리와 블라우스에 꽂았던 장미의 꽃잎은 흐트러지고 줄기만이 남아 있었다.-154쪽
소년은 몸을 바싹 밀어댔다. 그 동안 나나는 울새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추억에 잠겼다. 그렇다, 내가 이와 같은 것을 본 것은 로맨틱한 이야기책 속에서였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달과 울새와 애정에 가득 찬 소년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마음을 송두리째 바치려고까지 했던 것이다. 아아, 울고 싶다. 모든 것이 이토록 희한하다니! 그렇다, 나는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점지된 사람이다.-220쪽
그로부터 생활이 일변했다. “예” 하거나 “아니요” 하거나 퐁탕은 손찌검이었다. 나나도 습관이 되어 예사가 되고 말았다. 때로는 비명도 지르고, 덤벼들기도 했지만, 벽에도 몰아넣고 목을 졸라 죽인다고 하면 얌전해졌다.-301쪽
나나는 멋진 여자가 되었다. 이를테면 수컷의 어리석음과 욕정에 기식하는 거리의 후작 부인이 된 셈이었다. 잠깐 사이에 명성을 떨치고, 화려하게 돈을 뿌리며, 미모를 상품으로 화류계에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이다.-373쪽
“저 사람들에겐 이제 놀랄 것도 없지! 샅샅이 다 알고 있으니까 껍질을 벗겨보라지!…… 이미 존경 따위는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상하를 막론하고 세상은 지저분한 인간들뿐이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에게 이러쿵저러쿵 간섭받을 필요는 없는 거야.”-431쪽
그러나 이와 같은 장난은 마침내 장난이 아니고 말았다. 나나가 무자비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순한 타입의 여자였다. 다만 이 잠가 버린 방 안으로 광기가 흘러들었고 차츰 더해 간 듯싶었다. 음란한 기분이 두 사람을 탈선시키고 착란 상태로 빠뜨린 것이었다. 그전엔 잠을 못 이루는 밤에 신의 모 습에 두려워하던 두 사람이었건만 지금은 짐승처럼 목말라, 미친 듯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으르렁대고 서로 물어대는 것이었다. 어느날, 그가 곰이 되어 있는데, 나나가 거칠게 떠밀었기 때문에 가구에 부딪쳤다. 이마에 혹이 난 것을 보고 그녀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후로 나나는 라 팔르와즈에게서 맛들인 경험으로 백작을 동물 취급하며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고 발로 차가며 몰기도 했다.-535쪽
난 더 근사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서 그녀는 사탱에게 마지막 키스를 해주기 위해 치장을 하고 나갔다. 정결하고 단단한 육체가 아직 한 번도 써먹지 않은 숫처녀처럼 아주 새롭게 보였다.-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