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전하께 차비를 들일 것을 주청해야 할 듯싶소.”
상서령 유운식이 조심스레 입을 연 순간, 대전 안에는 싸한 긴장감이 흘렀다. 중신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텅 빈 옥좌에, 그리고 무관들 중 가장 윗전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은 대전에 없는 명제 이지천우, 그리고…… 상장군 단월서환.
올해로 쉰넷, 무관으로서는 최연장자인 서환은 대연국 제일의 무가인 단월세가의 가주였고, 또한 부원군이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상장군이되 이미 10여 년 전부터 태상장군(병권을 손에 쥔 상장군보다 높으며, 무관들의 수장인 지위. 그러나 실권이 거의 없는 데다 그 휘하에 군사를 거느릴 수 없는 명예직이다. )의 위에 머물렀음이요, 왕실의 오랜 충신이자 공신이기도 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지간한 왕족쯤은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볼 만큼 드높은 지위에, 무지한 백성들조차 경외하며 칭송하는 사내. 그가 바로 단월서환이었다.
또한 그것은 지난 2년간 조정 중신들이 도통 잉태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장군의 여식, 련비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현재 명제 이지천우와 련비 단월사휘는 서른을 앞두고 있었다. 타국의 왕실이라면 벌써 아이 서넛은 족히 두었을 법한 나이. 왕과 왕비가 국혼을 치른 것은 2년 전이었고, 암암리에 알려진 바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운우지정을 나눠온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련비는 단 한 번도 회임하지 못했고, 덕택에 왕실에는 아직까지도 후계자가 없었다.
워낙 명제의 총애가 극진했음이요, 부원군 또한 만만찮은 배경을 지닌 자인지라 누구 하나 감히 련비의 일을 문제 삼을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어디 그뿐일까. 비록 비공식인 지위라고는 하지만 련비는 저 살수부대 비영진의 수장이었고, 전(前) 어전호위검으로서 병무부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그녀를 건드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도 같았던 것이다.
한데 그러한 것들을 빤히 알면서도 명제의 후궁 문제를 운운한 자가 있는 터였으니……! 대체 저자의 목숨줄은 한 개가 아니라 아홉 개라도 된단 말인가. 조정 중신들이 경악 어린 눈으로 유운식을 돌아보는 사이, 문관들 중 누군가 입을 열었다.
“상서령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현재 이 대연 왕실이 명제 전하께서 옥좌에 오르신 이후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뒤를 이을 후계자가 절실합니다. 련비 마마께서는 아직 공주조차 생산하지 않으시지 않으셨더이까.”
상서령 유운식의 주장을 거든 자는 다름 아닌 경원가의 가주, 중서령 민진웅이었다. 그 맏딸이 명제가 세자였을 적 유력한 세자빈 후보이기도 했다던 경원가의 사내는 아직도 미혼인 여식 두 명을 두고 있는 참이었다.
“으음……. 그건 그렇소. 여염이라면 양자라도 들일 것이나, 예는 지엄한 왕실이지 않소. 다음 옥좌에 오르실 분은 어디까지나 명제 전하의 기상을 이어받은 왕자 마마여야 할 것이오.”
“그렇다면 역시 후궁을 들이는 것이…….”
한번 흘러나온 말들은 도통 그칠 줄을 모른 채 끝없이 이어졌다. 이때다 싶었던 문관들은 한두 마디씩 거들며 후궁 문제를 논의했고, 어느 틈에 그들의 의견은 조만간 날을 잡아 명제에게 후궁 문제를 주청하리라는 계획으로 바뀌어 있었다.
열띤 음성들이 오가는 사이, 무관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들의 수장, 서환을 주시했다. 보통 때와 다를 바 없이 무미건조한 얼굴, 표정 없이 닫혀 있는 입술. 마치 잘 벼려진 검 한 자루를 보는 듯한 느낌에 무관들은 소리 없이 한숨을 삼켰다.
문관들과는 달리 마음 깊이 단월세가를 칭송해왔음이요, 두 명의 세자를 보위하여 그중 한 명을 옥좌에 오를 때까지 지켜낸 전 어전호위검 단월사휘의 이름을 경외해 마지않는 그들이었다.
비록 여인의 본색을 감추고 사내임을 가장하는 대죄를 지었을지언정, 련비에 대한 무관들의 존경심은 만만찮은 것이 아니었다. 한데 그 부친인 상장군이 저렇듯 침묵하고 있는 터였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으랴.
일순, 무심히 다물어져 있던 서환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섣불리 명제 전하께 주청을 올렸다가는 목숨줄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사내의 음성은 모든 자들의 이목을 단번에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처음 말을 꺼냈던 상서령 유운식은 눈에 띄게 굳은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무, 무어라 하셨습니까, 상장군? 그 말씀은…….”
“제대로 들으신 것이 맞으니 더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서령. 저는 왕실의 신하이자 상장군으로서 말하고자 함이니 잠자코 들어보십시오.”
한순간, 당황 어린 기색이 역력했던 유운식의 눈에 교활한 빛이 번득였다. 말인즉슨, 련비를 제 여식으로 생각지 않고 말하리란 것이 아니던가.
“헛, 허험……. 그러십니까, 상장군? 이것 참 다행이구려.”
제법 많은 자들과는 달리 제상서령 단우형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제 잇속을 차린 계산도, 기대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상장군을 향한 비난과 한숨이었고, 단우형은 소리 없이 욕설을 뇌까렸다. 이런 미친, 젠장……! 그는 문관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
“상장군께서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심입니까?”
“사적으로는 제 여식이지만, 련비 마마께서 여태껏 왕손을 회임하지 못하심은 엄연히 왕실에 대한 불충입니다. 그러니 그 아비 된 자가 대신 죄를 받아야 함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서환은 감정 없는 눈으로 대전을 돌아보았다. 염려와 긴장감 서린 표정으로 그를 보는 자가 있는가 하면, 개중에는 눈에 띄게 간교한 얼굴을 한 자도 있었다.
본디 권력의 중추에는 옳은 자, 그릇된 자, 비틀어진 자가 모여들 수밖에 없다더니 어쩌면 이렇듯 눈에 보이는 것인지.
무심히 생각하던 것도 잠시, 서환은 소리 없이 자조했다. 하기야 그와 그의 여식 또한 그 권력의 일부가 아니던가. 아비는 병권을 총괄하고 있는 상장군이요, 딸은 내명부의 수장이자 왕의 반려인 터인데 이 무슨 쓸데없는 상념인 것인지.
그는 일말의 감정조차 엿보이지 않는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조만간 제가 직접 전하 앞에 나아가 후궁 문제를 주청하겠습니다. 무릇 왕실에는 든든한 후계자가 있어야 기반이 잡히는 법. 두 분 전하와 마마의 나이도 있으시니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하, 하면…… 상장군께서 친히 명제 전하께……?”
찰나의 순간, 서환의 눈에 묘한 한기가 스쳤다. 비웃음, 혹은 싸늘한 분노에 가까운 느낌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린 자는 오직 제상서령 단우형뿐이었다.
“제가 직접 나서면 전하께서도 더 어찌하시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중신들께서는 가까운 시일 내에 차비 후보로 적당한 분들을 추천해주십시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