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각 앞마당에 살포시 내려선 검휘가 넓은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서연이 바닥에 내려선 채로 우물쭈물 서 있자, 검휘가 팔을 뻗으며 따라오라는 행동을 취했다. 조용히 검휘를 따르던 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네가 기거할 방을 안내하는 길이다.”
“제가…… 지낼 방이요?”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뒤따르던 서연이 발을 멈춰 세웠다.
“한데서 지낼 수 없지 않느냐.”
다시금 몸을 돌린 검휘가 앞서 걸어갔다.
이곳에서 영영 지낼 것이라곤 생각진 않았지만,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지는 묵을 곳이 필요했기에 서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 침입자의 이목을 피했을 땐 창을 통해 빠져나왔기에, 그녀는 호안각의 구조는 물론 내부조차 자세히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때문인지,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가던 서연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호안각 건물을 두리번거렸다.
검휘가 기거하는 호안각은 생각보다 면적과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기와지붕과 처마는 민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 친근감을 주었지만, 전각 곳곳을 떠받치고 있는 둥근 기둥과 넓은 창은 사람의 기를 짓누를 만큼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두 마리의 백호가 양옆에 버티고 있는 돌계단을 차곡차곡 오르자, 마침내 호안각 건물의 출입구가 보였다. 출입구를 밀고 들어서자 붉은 융단이 길게 드리운 기다란 복도가 보였다. 복도는 양옆으로 길게 나 있었으며, 복도 끝에는 커다란 침실이 각각 하나씩 배치돼있었다. 긴 복도의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월동창이 띄엄띄엄 뚫려 있었고, 다른 한쪽 벽면엔 집무실과 그 외 서너 개의 방이 있었다. 복도의 오른쪽 끝은 현검휘의 침소였다. 그는 서연을 복도 왼쪽 방으로 안내했다. 왼쪽 방은 검휘의 침소와는 정면으로 마주 보는 위치였고, 또한 가장 멀게 위치한 방이기도 했다.
“여기다.”
네 폭으로 갈라진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젖힌 검휘가 침소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 없이 오래 비워둔 방이라 그런지 침소 안은 스산하다 싶을 정도로 온기가 없었다. 그녀의 젖은 행색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검휘가 문밖으로 나갔다.
“추선에게 적당한 시비를 알아봐두라 했으니 곧 너를 보필할 사람이 올 것이다.”
일방적인 말을 끝으로 검휘는 침소 문을 닫고 사라졌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서연은 침대에 얌전히 펴진 붉은빛 비단야금을 쳐다보았다. 핏빛 야금 속에 은사로 수놓인 백호의 얼룩무늬가 다시 한 번 이곳이 그녀가 살던 곳과 다른 세계라는 걸 각인시켜주는 것만 같아 가슴이 서늘했다. 반짝이는 백호를 손으로 쓸던 그녀는 힘없이 침대에 주저앉아 멍한 시선을 허공으로 내둘렀다.
“내가, 내가…… 유랑이었나……?”
내색하진 않았지만, 조금 전 애폭에서 현검휘가 유랑이라는 이름을 내린 순간 서연은 속으로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랑은 허민수가 꿈에서 보았다던 현검휘의 연인이기 때문이었다.
유랑이라는 그 이름이, 현검휘가 서연에게 붙여준 것이었다니…….
허민수가 마지막 꿈에서 보았다던 장면은 죽어가는 유랑을 끌어안고 현검휘가 오열하는 모습이라고 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죽어가던 여인이 유랑이라면, 앞으로 죽어야 할 여인은 곧 그녀 자신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곳 몽환세계에 갇혀 끝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인 걸까?
순간 뒤통수를 그물로 옭아매는 듯한 소름이 저릿하게 일었다. 그것이 정말 자신의 마지막이라면, 아니, 곧 들이닥칠 현실이라면 그땐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가족들과 태웅에게 돌아가지도 못한 채 낯선 세계에 갇혀 영원히 안식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자, 서연은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아냐. 낙담해선 안 돼. 내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 그걸 알게 되면 돌아갈 길이 생길지도 몰라.’
유랑을 안고 오열했다던 현검휘가 막상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그녀가 이곳 세계로 흘러들게 된 것도,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간에 그 이유를 알고 나면 돌아갈 문도 열리게 되겠지. 서연은 한 가닥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로 했다.
‘내가 정말 용의 눈을 통해서 여기로 왔다면 분명 돌아가는 길도 거기에 있을 거야. 그래. 조금만, 조금만 참자. 이대로 절망하고 포기할 수는 없어. 난 죽지 않아. 허민수의 꿈처럼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는 않을 거야. 반드시 살아서 이 꿈에서 깨어날 거야. 반드시!’
다부지게 말아 쥔 작은 주먹이 그녀의 굳은 신념을 말해주듯 작게 떨려 왔다.
“귀인. 계시옵니까?”
“누……구시죠?”
침소 문을 열고 들어와 서연에게 예의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사람은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하게 생긴 여인이었다.
“오늘부터 귀인을 보필하게 될 시비, 소소라고 하옵니다.”
“아…… 네…….”
소소가 공손하게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우자,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쭉 뻗은 키가 서연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인치고는 장신에 속한 소소는 언뜻 서연의 키와 비슷해 보였고, 약간 마른 듯한 체구까지 서연과 무척 비슷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서연의 이목구비는 시원시원하게 생긴 데 비해 소소는 귀염상인데다 동안이라는 점이었다.
침소 안으로 발을 깊숙이 디밀은 소소가 서연의 젖은 옷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부교주님께서 목욕실에 더운물을 준비하라 하명하시었답니다.”
“괜찮……아요.”
서연이 축축이 젖은 옷가지를 여미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귀인의 건강이 저어되옵니다. 더구나 부교주님의 하명이 있었기에…….”
“아뇨. 전 지금 한가하게 목욕할 마음이…….”
서연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소소의 표정이 잠시 경직된 것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소소 역시 현검휘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서연이 보기엔 소소는 그의 명을 이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서연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검휘의 장포를 벗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소소의 안내를 받았다.
한편, 서연을 침소에 안전하게 데려다 놓은 검휘는 호안각 입구로 나갔다. 두 마리의 백호가 조각된 석상 사이에 위풍당당하게 선 검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두운 허공을 노려보았다.
“흑풍마영!”
낮은 목소리가 짧게 끊기자, 어둠 속에서 네 개의 그림자가 튀어 올라 계단 아래에 신속하게 안착했다.
“흑풍마영, 현검휘 부교주님을 뵈옵니다!”
일사분란하게 몸을 움직인 네 개의 그림자는 흑풍마영의 환영, 추선, 유구, 마사였다. 자신의 수하들을 예리한 눈으로 훑어보던 검휘가 차가운 음성으로 현재 상황을 물었다.
“살기의 정체는?”
“칠성검대라 합니다.”
“몇이나 되더냐.”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았으나,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대략 쉰의 무리였습니다.”
환영의 보고에 검휘는 태연히 뒷짐을 지며 입매를 차갑게 끌어 올렸다.
“쉰이라면 칠성검대의 일 개 분대라는 소리군. 습격의 의도는?”
“사애도성을 정찰하고 만월교의 위력을 시험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추선이 대답했다. 고개를 가로저은 검휘가 입술을 비틀었다.
애폭에서 서연을 안고 호안각으로 몸을 날렸을 때, 검휘는 이미 사애도성 곳곳에 숨어 있는 침입자들의 살기를 간파한 터였다. 의식을 차린 서연과 대화할 당시 호안각으로 날아들었던 듣는 귀의 기운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살기. 곳곳에 퍼진 살기의 정체가 칠성검대였다니!
칠성검대는 총 일곱 개의 분대로 이루어진 군대다. 각각의 분대를 지휘하는 분장들이 따로 있었지만, 칠성검대 전체를 지휘하는 자는 황제 염웅의 충복인 산조였다. 사애도성에 발을 들인 쉰의 인원 중, 살아 나갈 놈이 한 놈도 없을 것이라는 것은 산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이렇게 무모한 짓을 자행하다니. 겨우 쉰 명의 인원을 이끌고 잠입한 칠성검대가 만월교 내에서 어느 누구와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답은 하나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무공을 쓰지 못하는 시비들과 시노들일 것이었다. 칠성검대는 힘없는 노비들을 죽여 만월교도들의 이목을 잡아놓을 계획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 개 분대의 목숨을 전부 내놓고서라도 사애도성을 발칵 뒤집어놓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바로 칠성검대의 수장 산조가 사애도성에 숨어들었다는 말이 된다. 적은 수의 인원이 잠입하였음에도 살기를 전혀 갈무리하지 않고 사애도성을 휘젓는다는 것은, 그들의 수장 산조가 무사히 탈출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인 것이다.
“단순한 정찰이 아니다. 본좌가 느낀 것은 살기였다. 놈들은 분명 산조의 탈출을 돕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사애도성을 뒤집고 있는 것이다. 흥, 죽여달라 하니 그리해주는 수밖에. 지금 놈들이 노리는 것은 힘없는 노비들일 것이다. 그들의 처소에서 기다렸다가 놈들의 목을 따도록 해. 유구는 당장 혈견(血犬)들을 풀어 나머지 놈들을 처리하도록!”
“존명!”
검휘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 가닥의 검은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검휘는 흑풍마영이 사라진 어둠을 주시하며 비웃음실린 어투로 낮게 읊조렸다.
“맹금(猛禽)이라 하더니 과연 새가슴이로군, 산조.”
몸을 돌린 검휘는 서연과 시비가 쉬고 있을 불 켜진 호안각을 쳐다보았다.
‘칠성검대가 이곳까지 기습하진 않겠지.’
호안각이 사애도성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는 것에 안심한 검휘는 나머지 침입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빠른 몸놀림으로 신형을 날렸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