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는 언제 보아도 신비롭구나.’ 산세가 험하여 오르는 이가 없는 천산인지라 그 적막함조차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하다. 몽글몽글 물방울처럼 꽃잎을 말고 있는 보랏빛 천일화들이 달빛에 반사되어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서자부에 있을 때에는 일 년에 두 번씩 훈련 삼아 오르기도 했었지만, 볼 때마다 늘 신비로운 곳이 바로 이곳 천지였다. 칠흑같이 검은 자윤의 눈동자에 유난히 밝은 빛을 띠는 천일화들이 투영된다. 타탁! 천 일에 한 번 열린다는 보랏빛 꽃잎이 터지며 살랑살랑 흩날리는 금빛의 꽃가루가 더욱 밝은 빛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꽃잎을 열었구나.” 마치 그의 귀환을 반겨주는 듯 천일화가 봉우리를 터트렸다. 꽃잎 사이로 금가루처럼 피어올랐다. 타다탁! 세 걸음 앞으로 또 다른 천일화가 꽃잎을 연다. “신기한 일이로군.” 집어 들었던 옷가지 들이 자윤의 손에서 떨어져 내렸다. 자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걷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길을 밝혀주는 양 하나씩 하나씩 거리를 두고 봉우리를 터트리는 천일화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천일화 군락의 중심부로 은가루가 쏟아져 내리는 듯 유독 달빛이 모여드는 곳. 청초한 달빛 때문인지 달큼한 술처럼 취할 듯 몽롱한 향을 뿜어내는 천일화 때문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천……녀…….” 그가 멈춰 선 곳, 천일화로 둘러싸인 것은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만개한 천일화 사이로 너무나도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여인을 자윤은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천 일에 단 한 번이라 꽃잎 여는 것을 보기조차 힘들다는 천일화가 유독 여인의 주변에만 활짝 벌어져 금빛 가루를 반짝이고 있다. 밤하늘을 베어낸 듯 새까만 여인의 머리카락이 흐르는 물처럼 천일화 위로 흩어져 있다. 볕에 그을린 자윤의 피부보다 훨씬 밝은 빛을 띠는 여인은 동그스름한 이마에 머리카락만큼이나 풍성하고 짙은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으며 코는 높지 않았으나 반듯했다. 혹여 무슨 일을 당하여 쓰러져 있는 것은 아닌가 자윤의 손이 여인의 코끝으로 향했다. 손끝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숨을 쉬는구나.’ 얌전하게 두 손이 모아진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깊은 잠에 빠진 듯하다. 여인의 코끝에 머물던 손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채로 살며시 벌어진 여인의 입술로 향했다. 자윤은 손끝을 타고 오르는 작은 숨결에 전율을 느꼈다. “하아…….” 여인이 달뜬 숨을 내뱉으며 가지런히 모여 있던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란 자윤은 손을 거두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잠투정을 하듯 팔을 머리 위로 얹자 하얗게 여인의 몸을 감쌌던 천 조각이 벌어지며 봉긋하게 솟아 오른 젖가슴이 드러났다. 숨을 들이켜며 자윤이 물러선 사이 여인이 허리를 틀었다. 천 조각 사이로 탄탄하게 뻗어 내린 다리가 보인다. ‘어째서……. 왜 이런 곳에…….’ 마음은 물러서려 하였으나 몸은 바람을 따라 흐르는 구름처럼 여인의 위로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자윤은 꽃잎 위로 내려앉는 이슬처럼 여인에게로 몸을 숙였다. 무엇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진 여인의 입술에 닿았다. 여인에게 입맞춤하자 수줍게 내려다보던 달빛이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그렇게 달도 별도 숨어버렸다. 세상은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여 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떨리는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암흑 속에서 초록빛으로 떠오른 반디 하나가 여인의 머리 위쪽에서 노란색으로 떠올랐다. 팔 아래서도 하나. 다리 뒤에서도 하나. 하나둘씩 사방에서 모여든 반딧불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늘어나 둥그런 원형으로 자윤과 여인을 감쌌다. 수백 수천 개의 반딧불들이 작은 빛을 발하며 보라색 천일화와 화합하여 오묘한 빛을 만들어냈다. “하아……. 아아.” 달뜬 여인에게서 흘러드는 향긋함에 취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자윤은 부드러운 여인의 입술을 살며시 빨아들였다. 입맞춤을 하는 그의 모습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인의 붉은 입술을 핥던 혀가 달콤한 내음을 뿜어대는 여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더 깊게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여인의 등으로 팔을 감아 들어 올리니 여인의 눈꺼풀이 사르륵 열렸다. 흐릿한 여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자윤은 흠칫 입술을 떼었다. 바람도 공기도 멈추어버렸다. ‘봉황…….’ 루아는 불꽃을 뿜어내며 화려하게 날갯짓하는 커다란 주홍색의 봉황을 보았다. 천지로 날아들어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기에 달려갔더니 더욱 화려하게 불꽃을 일으키며 물속에서 날아오른 봉황이 루아의 앞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붉은 주홍색의 불꽃을 가진 아름다운 봉황이었다. 따뜻하고 강인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봉황의 눈동자가 가슴 시리게 애달프다. 매의 발톱처럼 날카롭던 봉황의 발은 길어지고 붉은 깃털은 단단하게 갈라진 근육들로 변했다. 커다란 봉황의 날개가 루아를 감싸 안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를 두고 멀어지려 한다. 그 상실감이 못 견디게 서러워 루아가 봉황의 날개를 잡았다. “봉……황.” “자윤이라 하오.” 봉황의 따뜻한 온기가 아쉬워 거세게 움켜쥐니 새까만 눈동자 속에 혼란이 들어찬다. “그대는…….” “루아…….” 꿈이라도 좋았다. 애틋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봉황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루아.” 입 안으로 예쁘게 구르는 이름이었다. 자윤은 달뜬 신음을 뱉어내며 더욱 짙은 향기를 뿜는 루아의 손길에 이끌려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잔잔한 입맞춤이 허기져 그녀의 목을 잘근잘근 깨문다. 달다. 입 안으로 그녀의 향기가 가득하게 들어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