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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

김동기 | 아침이슬 | 2000년 08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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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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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0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54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8996041
ISBN10 8988996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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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가 직접 쓴 최초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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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동기
1932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났고 함경북도 성진(현재 김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0년 전쟁 때는 고등학생으로 인민군에 지원입대해 서울, 추풍령, 낙동강, 동부전선 전투에 참가했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 후 노동학원(대학예과과정)을 마치고 평양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는 민주청년동맹 대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약했으며, 졸업 후에는 상업성에 들어가 상품과 과장을 지냈다.

1965년 경상남도 진양군에 정치공작원으로 내려왔다가 다음해 주민의 신고로 군경에 포위되어 허리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1967년 12월 대법원에서 무기형이 확정되어 대구·대전·광주 감옥에서 3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99년 2월 25일 형 집행정지로 출소해 현재 전남 광주 '통일의 집'에 거주하고 있다. 북에는 처와 아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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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행사가 있다고 해서 30여 년만에 처음으로 기차를 탔다. 몇십 년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너 하나도 안 늙었구나! 옛날과 똑같애" "나도 벌써 80대야" 하면서 서로 포옹을 하고 반가워하는데 60대 후반인 나는 막내 축에 속해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선배들의 만남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래도 광주 감옥에 있을 때는 '좌상' 소리를 들었는데 석방되고 나와보니 내 나이 68세로는 겨우 막내를 면할 정도였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상봉의 감격으로 눈시울을 적시는 선배도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느닷없이 "이번 기회에 모두 영정 사진을 찍읍시다"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알고 보니 그날은 석방된 사람들 모두가 모여서 영정 사진을 찍도록 일정이 잡혀 있었다. 살아서 나오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겨우 살아서 나왔는데 기껏 영정 사진을 찍자고 하니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감옥 안에 있을 때는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는데 막상 출소를 하고 보니 다시 죽음이란 문제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누군가가 얼른 그 이유를 말했다. 1998년에 금재성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장례 준비를 하는데 영정 사진으로 쓸 만한 게 없어서 애를 먹어서 이번 기회에 사진작가들이 영정 사진을 찍어주기로 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묘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에서는 좋은 추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지만 감옥에서는 보안상의 이유로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다. 감옥에는 개인 신분대장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붙일 사진을 수시로 찍는다. 이 사진은 무슨 일이 있을 때 본인여부를 확인하거나, 수용자가 탈옥했을 때 수배전단의 사진으로 사용하게 된다. 정치범인 경우에는 더 자주 사진을 찍는데, 매주 토요일에 실시하는 점검에서 신분대장 사진과 본인이 맞는지 대조해 실물과 사진이 비슷하지 않으면 표시를 해두었다가 다음날 다시 사진을 찍어서 붙인다. 그래서 인지 감옥에서 실시하는 사진촬영은 결코 유쾌하지가 않았다.

수용자들은 자기 번호와 이름을 쓴 30㎝×10㎝ 크기의 널빤지를 가슴에 들고 사진을 찍는데 이를 가리켜 감옥에서는 '약혼사진'이라 부른다. 또 감옥에서는 이름 대신 번호를 부르는데 가로 7㎝, 세로 3㎝ 크기의 광목 천에 먹물로 찍은 번호표를 왼쪽 가슴에 붙이고 다닌다. 누가 면회를 와서 신분대장을 확인할 때, 사진에 나타난 번호와 수용자가 가슴에 달고 있는 번호를 대조해서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경북 예천군 출신이며 경남도당 간부였던 안 선생은 1950년 초에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구속되어 재판 중에 있었다.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간수들이 체포된 남로당 간부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서 신분대장과 실물을 확인한 후 총살을 하기 시작했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누워있게 한 후에 한 사람씩 호명했다. 한 간수가 안 선생의 수번인 900번을 몇 차례 불렀지만 안 선생은 고개를 수그린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 선생은 천연덕스럽게 "900번 방금 전에 불려 나갔습니다"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간수는 "900번 나갔어?" 하면서 그냥 가버렸다. 서울에 인민군의 대포 소리가 들리고 남쪽 군대가 후퇴하는 터라서 간수가 신분대장의 사진을 철저하게 대조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안 선생이 기발한 순발력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간수가 일일이 사진과 실물을 대조했더라면 선생은 그날 밤에 총살되고 말았을 것이다.

석방되어 나오니 사람들이 만나면 함께 사진을 찍자고 야단이다. 어떤 사람은 사진기를 갖다 주면서 사진을 많이 찍어두었다가 고향에 갈 때 가지고 가라고 권하기도 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사진기를 받았으나 처음에는 어색해서 사진을 찍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찍어주기도 하고, 나도 많이 찍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이 찍어준 사진을 사진첩에 정리하다보니 온통 석방 후의 내 사진들이다. 1990년대에는 밖에서 보내준 사람들의 사진을 교도소에서 판매하는 사진첩에 끼워두고 자주 보았다. 감옥에서는 개인 사진을 찍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사진첩에는 내 사진이 한 장도 없었고, 전부가 남의 사진이었는데 석방 후의 내 사진첩에는 반대로 내 사진뿐이다.

사진첩을 보면서 감옥생활을 시작한 30대 중반부터 6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내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은 쓸쓸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월과 함께 변해 가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갖게 마련이다. 그리고 자기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며 지난날을 추억한다. 그러나 나는 30대부터 60대까지의 내 모습을 되돌아 볼 사진이 없다. 30대 청년시절 내 모습은 어떠했을까? 40대 불혹의 모습은, 또 50대의 내 모습은….

사진의 또 다른 이름은 추억이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세월 속으로 사라져 버린 지난 30년의 인생이 가끔은 안타깝다. 앞으로도 살아갈 인생이 많이 남긴 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때의 내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북한에 있는 내 아들의 사진첩에도 이 아버지의 모습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자리가 텅 빈 채로 남아 있는 그 자리를 채워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일까. 나는 가끔씩 40대, 50대 때의 내 모습이 찍힌 사진을 한 장이라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 영정 사진 찍어야 합니다 중에서
나는 생일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 사회에 있는 지금도 그렇지만 감옥에서는 주위 사람들이 생일을 축하해 줄 때에야 비로소 생일인줄 아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 시절 어쩌다 흰밥에 삶은 계란 두 개가 놓인 그날은 틀림없이 내 생일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그나마 생활에 여유가 생겨 생일날 꽁치통조림이라도 구매해서 먹어 보려고 했지만 구매품목 제한으로 그마저도 구매할 수가 없었다. 구매품목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든 관리는 모르긴 해도 자기 생일날 고기에, 떡에, 술을 마시며 기분을 내겠지만 감옥 안의 사람들은 1년에 한 번 있는 생일날 컵라면을 별식으로 먹는다.

출소 후에 주위사람들이 내 생일잔치를 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감옥에서는 생일, 특히 회갑을 맞은 사람을 전향공작으로 회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결과는 언제나 비참했다. 그래서 생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차라리 편했다. 더욱이 회갑날 모욕을 당했거나 아무런 행사 없이 쓸쓸하게 생일을 보낸 선배들도 많은데 내 생일을 입밖에 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죄를 짓는 일이었다. 그런데 생일날 저녁에 여러 사람이 통일의 집을 찾아와 식사를 함께 하게 됐다. 그때 나는 내 평생 잊지 못할 생일 이야기를 했다.

1969년 10월, 중풍환자 간병을 위해 세 사람이 함께 살던 때의 일이다. 신 선생이 아침에 소지를 불러 50원하는 식빵 한 줄과 사탕 한 봉지를 구매하겠다는 신청을 했다. 신 선생님은 위가 좋지 않아서 아들이 약값으로 매달 500원씩 영치금을 보내주었는데, 그중 100원을 써버리면 약을 어떻게 구입하겠다는 것인지 걱정이 앞섰다. 나는 신 선생이 소지에게 무엇인가 중요한 부탁하고 사례를 하려고 물품을 구입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녁에 물품이 들어왔는데도 소지에게 주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식사 때였다. 신 선생이 식빵 5개 중 3개를 꺼내더니 세 사람의 4등밥 덩어리 위에 한 개씩 올려놓았다. 그 쫄깃쫄깃했던 식빵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먹어본 빵 중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었다. 밥을 다 먹은 후에 신 선생은 20개가 든 알사탕 봉지를 터뜨려 한 사람 당 두 개씩 나누어주었다. 나는 사탕을 입에 넣고 오래도록 빨아먹었다. 식빵 한 덩어리와 알사탕 두 개를 먹어서인지 그날 오전에는 책을 보아도 졸리지가 않고, 몸도 피곤하지 않았다.

점심 식사 때는 남은 식빵 두 개 중 한 개를 중풍 환자인 안 선생에게 주고, 나머지 한 개를 나보고 먹으라고 했다. 내가 거절하자 선생은 식빵을 반으로 나누어 함께 먹자고 했다. 그리고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알사탕 두 개씩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알사탕을 입에 넣고 되도록 오래도록 먹으려고 조심조심 빨아먹었다. 저녁식사 후에도 알사탕을 두 개씩 나누어 받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남은 알사탕 2개가 문제였다. 신 선생님은 환자에게 한 개를 주고 나머지 한 개를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내가 먹어야 한다며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나는 그럴 수는 없다며 다시 선생 앞으로 사탕을 밀어놓았다. 그렇게 몇 차례 실랑이가 있었다. 신 선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알루미늄합금 식기 두 개를 꺼내더니, 그릇 하나를 뒤집어 그 위에 알사탕을 올려놓고, 다른 식기 뒷등으로 알사탕을 내리쳤다. 신 선생은 재빠른 동작으로 작은 알사탕을 자기 입에 집어넣고, 큰 알사탕 조각을 내 몫으로 내주었다. 더 이상은 거절할 수가 없어서 부서진 알사탕 조각을 입에 넣고 조심스럽게 빨고 있는데 신 선생이 슬며시 내 손을 쥐었다.

"오늘이 김 동지 생일이지? 축하하네!"

정신이 번쩍 들어 날짜를 따져보니 틀림없이 내 생일날이었다. 내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달디달아야 할 알사탕 맛이 무슨 맛인지 모를 정도로 나는 목놓아 울어 버렸다.

세월이 흘러 30년이 지났지만 그 날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일까. 그 생일날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할 때면 내 목소리는 심하게 떨린다. 그 때 함께 지냈던 안 선생은 1976년 대전 감옥에서 옥사했다. 출소한 후에 신 선생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 잊을 수 없는 생일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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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생존해 있는 비전향 장기수 77인의 징역살이 기간을 모두 합하면 2854년에 이른다. 군사독재 시절 0.75평 독방에서 전향을 강요당하며 추위와 굶주림, 폭력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온 그들의 삶은 그 동안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 말이 쉬워서 30년, 40년이지 독방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고독, 즉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거의 다 정신이상자로 불우한 생활을 해야 했다. 필자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웠다. 전향을 하지 않는다고 사전을 압수하면 성경을 외웠고, 그마저 금지 당할 때는 감시자의 눈을 피해 바느질과 뜨개질을 했다."고 말한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한 조건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영치금이 없어서 칫솔 한 개로 3년을 사용하고, 변변한 내의 한 벌 사 입지 못해 다른 사람이 버린 구멍난 헌 내의를 주어다가 천을 덧대어 입고, 몇 년 동안 발바닥 부분에 천을 덧대어 버선처럼 돼버린 양말을 신고, 그 양말에 구멍이 나면 양말 두 짝을 이어서 목도리로 만들고, 그마저 해지면 둥글게 만들어 귀마개로 쓰면서 감옥생활을 했다. 필자는 "모르긴 해도 감옥생활 33년 동안 바느질로 소비한 시간이 10년은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한다.

비전향수들에게 배고픔과의 싸움도 또 하나의 생존전쟁이었다. 4등식(감옥에서 가장 질이 떨어지는 밥) 형타밥(가다밥이라고도 함) 세 덩이에 의존해서 하루를 보내야 했던 그들은 오랜 감옥살이로 위가 망가져 양말에 밥을 넣어 짓이겨 먹거나, 손으로 밥을 짜서 풀처럼 만들어 먹으며 질긴 목숨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동지애 때문이었다. 그들은 젊고, 체중이 많이 나간 동지를 위해 밥맛이 없다는 핑계로 밥을 양보하고, 알사탕 한 개라도 쪼개서 나누어 먹고, 마가린 한 덩이를 45등분해 세 사람이 보름 동안 나누어 먹고, 명절에 특식으로 나온 사과를 씨 하나 남기지 않고 먹으면서 살아 남았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전향공작반의 폭압적인 전향공작에 몸 하나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전향공작반은 비전향수의 이빨을 다 뽑아놓고 전향을 하면 틀니를 해주겠다고 하고, 암에 걸려 죽어 가는 환자를 앞에 두고 전향하면 수술을 받게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의 지문을 전향서에 찍고 전향했다고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는 "전향공작이 극심했던 그 시절에는 전향공작반에서 부른다고 하면 무조건 헌 내의 두벌을 껴입고 나갔다. 매를 맞게 되더라도 내의가 조금이라도 방패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말한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왜 전향을 거부하고,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았던 걸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이념의 노예'여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 결코 양심을 굽힐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던 것이다. 그들은 전향서나 준법서약서가 단순히 종이 한 장에 도장을 찍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종이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평생동안 심적으로 고통을 주는 족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양심의 감옥이 아닌 육체의 감옥을 선택했고, 양심을 져버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30년, 40년 만에 15척(5미터 정도 되는 높이) 담 밖으로 나온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낯설었다. 혹독한 겨울 추위로 얼어죽는 비전향수가 생기는 독방에서 33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따뜻한 온돌방에서 두 다리 뻗고 자는 게 소원"이었던 필자는 "석방된 첫날 밤 숙소로 정해진 방은 바닥이 무척 뜨거웠다. 죽지 않고 살아서 따뜻한 방바닥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설렘은 너무도 허망하게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마루바닥에서 잠자던 습관이 체질이 되어서 "결국엔 보일러 스위치를 끄고 허망한 마음을 감싸안으며 잠자리에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좀 넓은 감옥일 따름이었다. 당장에 먹고살 일이 문제였다. 인권단체, 종교단체의 도움을 받아서 보금자리를 마련했지만, 생계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취로사업장에 나가서 공공근로를 해야만 했다. 고령의 몸으로 공공근로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남쪽 동포들이 보여준 따뜻한 정이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필자도 광주 무등산 등산로를 청소하는 일을 했다.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안면을 익힌 등산객들이 수고한다며 1만 원권을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는 국가가 노임을 지급해서 공공근로를 하는 준공무원이기 때문에 뇌물을 받을 수 없다며 웃어넘기곤 했다"고 한다.
"우리들은 30∼40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한테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 사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나의 형제요, 가족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결코 외톨이가 아니었다. 역시 우리 민족은 다정하고, 마음씨 곱고, 불행한 사람을 동정하는 여유를 가진 민족이었다. 나는 이렇게 인정 많은 사람들과 내가 한 민족이라는 사실이 기쁘고 행복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고통스러웠던 33년의 감옥생활보다 즐거웠던 1년 6개월의 사회생활을 가슴속에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이다.

인생에 후회는 없는가

그는 "북에 있는 아내와 아들에게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생에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은 있다"고 말한다. 요즈음 필자는 언제 다시 볼지 모를 남쪽의 산천을 눈에 담느라고, 또 지난날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다니느라고 매우 바쁘다. 한편으로는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 눈물은 북으로 가게 되어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출옥 후에 만난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다. 그는 "광주는 나에게 제2의 고향이고, 이곳 사람들은 정든 가족이요, 친척이다. 그런데 이산가족이 되어야 한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북으로 갈 때, 이곳 사람들이 베풀어준 따뜻한 정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갈 생각이다. 그래서 나의 가족과 친지와 이웃, 고향의 모든 사람들에게 남쪽 동포들의 동포애를 전하는 것이 나의 도덕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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