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학의 시는 90년대 후반부터 전위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하나의 영토이자 세계다. 이천년대의 소위 모던한 시인들치고 정재학 시에 빚을 지지 않은 자는 드물다. 그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상상력과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미니멀리즘의 감각세계, 그리고 예민한 정신분석의 세계에까지 다양한 범주로 전위적인 개성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의 세계는 새로움의 외피를 입은 언어적 양식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유희를 넘어 그는 늘 묵직하게 자아의 내면세계를 오래도록 탐하였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언어로 연주하는 재즈에서부터 씻김굿까지의 향연을 펼친다. 음(音)을 색(色)으로 치환하여 자신의 몸으로 감각화시키는 그의 재기가 곳곳에서 펼쳐진다. 그의 음계(音階, 音界)는 새로운 화성학이라 할 만한 불협화음적인 상상력과 악기의 상상력, 음악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채를 시어로 연주한다. 더 나아가 음악과 시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의(祭儀)의 세계를 낯선 방식으로 꼴라주한다. 서양음악에서부터 우리의 소리로까지 수렴되는 과정을 따라가보면 신비한 빛을 발하는 길목에서 걷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새롭게 선보이는 장면들은 교사와 학생들이 어울려 있는 교실의 공간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몇몇 시들은 지금의 교육현실과 학창시절의 기억이 중첩되면서 소름이 끼쳐지기까지 한다. ‘흑판’ 연작은 환상적 이미지를 통해 고통받는 아이들의 교실을 환기하고, 경찰관이 시체를 두고 벌이는 ‘공모’는 지금 현실의 은유이다. 어쩌면 이 풍경들은 환상이 아니라 가장 극적인 현실인지도 모른다. 이재훈(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