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와 식사를 마치고 근처 공원을 걸었다.
“날씨가 따뜻해서 좋다. 이번엔 봄이 빨리 오려나 봐요.”
손을 꼭 잡으며 걷던 윤주가 손을 놓더니 갑자기 제 손을 그의 심장에 가져다 댔다. 두근두근 노크하듯 그녀의 심장 소리가 그의 손을 두드리며 전해졌다.
“선배가 언젠가 말했죠? 내 마음에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윤주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선배가 내게 온 게 봄이었어.”
겨울비가 내리던 날, 그가 우산을 씌워 주며 윤주에게 말했다. 겨울비가 오면 봄이 온다고. 너에게도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 그는 그 말을 떠올렸다.
“이게 선배가 사랑한다고 한 말의 답이에요.”
윤주가 그의 볼에 짧은 입맞춤을 하고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사랑한다고 했던 말의 대답. 비로소 8년 만에 그녀에게 대답을 들었다.
“당신이 내 봄이에요.”
“윤주야.”
“영원히 선배가 내 봄이었으면 좋겠어. 어디 가지도 말고, 평생 내 옆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부끄러워하면서도 윤주는 할 말을 다 했다.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면서. 윤주의 수줍은 고백에 이유는 응답이라도 하듯이 윤주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어서 들어가.”
“선배 가는 거 보고, 어서 가요.”
이유는 윤주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 앞에서도 둘은 손을 잡고 놓지를 못하고 있었다. 뒤돌아 내리막길을 가는 그를 향해 윤주는 잘 가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헤어짐이 아쉬운 듯 손을 흔드는 그녀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반은 싸 두고, 반은 싸지도 못한 짐을 보았다.
윤주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 날, 마음을 정리한 사람처럼 두서없이 짐정리를 했다. 아직 제대로 된 임용고시 준비는 시작도 못했다.
그는 얼마 전에 윤주가 잠들었던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윤주를 보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아직 윤주의 아버지에겐 제대로 된 용서도 구하지 못했는데. 윤주의 아버지 말대로 떠나는 게 죄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도 했다. 그래서 윤주가 행복하다면, 윤주가 웃을 수 있다면, 윤주가 과거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면.
떠나려고 했다. 아버지에게 학교 교수님이 유학을 추천해 주었다며, 유학비도 공짜라고 거짓말을 해 가면서. 물론, 아버지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지만.
윤주가 대문 안을 들어서자, 돌계단 앞에 현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어디 나가세요?”
“아니오. 아가씨를 기다렸습니다.”
“저를요?”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윤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잠시 걸음을 멈춘 현우가 정원 한가운데 있는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윤주를 향해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할 말 있으세요?”
“일단 앉으세요.”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현우의 말에 윤주는 멈칫거리다가 의자에 앉았다. 어릴 땐, 태권도나 유도를 가르쳐주며 무술 사범님으로 따랐는데, 조금 자라고 난 이후엔 편안한 아저씨처럼 대했던 현우였다. 그런데 지금 분위기는 딱 옛날 어릴 때, 무술 사범님의 엄한 모습이었다.
“이유 군과 오늘도 만나고 오셨습니까?”
“네.”
“회장님이 알고 계시는 것도 알겠군요.”
“아빠가 붙인 사람들이 늘 곁에 있다는 거 저 잘 알아요. 외국에 있을 때도 그랬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계속 사람 붙였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러시군요.”
사람을 붙인 것을 알고 있다는 윤주의 말에 당황했지만 현우는 침착하게 대답하고 다음 말을 이었다.
“아직 사모님께서는 아무 것도 모르십니다.”
“알고 있어요. 나는요, 엄마가 끝까지 모르고 있다가 그냥 내 행복 축하해 줬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나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거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엄마한테는 지금까지처럼 비밀로 해 두셨으면 좋겠어요.”
“이유 군을 계속 만나실 생각입니까?”
“네. 앞으로 지금처럼 만날 거예요. 두 번 다시 서로의 옆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결심을 굳힌 듯한 윤주의 대답에 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부터 한다면 고집을 펴서라도 하는 성격이었는데, 사랑마저 고집스러움이란.
“아저씨, 저 응원해 주실 거죠? 아저씨는 내 편이잖아요.”
“윤주 양 편이긴 하지만, 전 의원님의 사람입니다.”
현우의 대답에 윤주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곁엔 현우 같은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외롭지는 않으실 테니까.
“전에 저한테 물으셨죠? 이유 선배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냐고.”
“…….”
“용서할 수 있어요. 이제는.”
전과는 달리 망설임 없는 윤주의 말에 현우가 고개를 들어 윤주의 눈을 응시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진실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혹시라도 아빠가 저하고 선배에 대해 물어보신다면 대신 전해 주시겠어요?”
“뭘 말입니까?”
“지나간 과거의 상처보다 이유 선배가 지금은 더 소중하다고. 이젠 선배가 제게 그런 사람이라고. 조금만 지켜봐 달라고요.”
윤주가 할 말 다 끝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난 윤주가 현관으로 들어갔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정원에 혼자 앉아 있는 현우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마냥 지켜 줘야 할 것 같은 어린 아가씨였는데, 어느새 저렇게 커 버렸을까. 최 의원이 조금만 지켜보자는 말을 그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