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한말(漢末)[건안(建安)10년, 205] 조조(曹操)의 금비령(禁碑令)과 위진(魏晉) 남북조 시대에 걸친 묘전금비령(墓前禁碑令)의 영향으로 위진에서 남북조까지 남아 있는 비각(碑刻) 자료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금비(禁碑) 풍조가 고구려에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 능비문의 “자상조선왕이래묘상불안석비(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능비 제4면 제7행 제33자부터 제8행 제4자까지]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당시의 국제 질서로 보아 중국보다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높은 문화와 매우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고구려는 중원의 삼국분란(三國分亂)시기〔220~280〕나 위진 교체기[300년 전후시기] 또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기의 혼란한 중국을 넘볼 수 있는 동북아의 패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당사자인 광개토대왕이나 그 사왕(嗣王)인 장수왕이 중국의 금비령을 그리 크게 중시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장수왕은 선공선왕(先公先王) 이래로 초유이면서도 동북아에서 최대의 기념비(紀念碑)를 건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념비는 지금까지도 세계 최대의 것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이 능비와 관계있는 연구 논문 중에 나진옥(羅振玉)의 “고려호태왕비발(高麗好太王碑跋)”[1909]에서는 이 능비가 해동(海東) 고각(古刻)의 으뜸(此碑爲海東古刻之冠)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수곡제이랑(水谷悌二郞)도 지나(支那)[중국을 지칭] 고비(古碑)가 호태왕비의 거대함만 못하다고 하였다. (...중략...)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이 능비문의 서법과 그 존재 가치를 칭송하였는데, 이는 분에 넘치는 찬사만은 아니다. 실제로 이 능비는 비신(碑身)의 위려함, 서체(書體)의 질박함, 비문(碑文)의 호방함, 그리고 자품(字品)의 근엄함뿐만 아니라 도처에 독창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거대한 광개토대왕의 훈적비의 문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법 재료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동양 금석학상에서도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능비문은 매우 높은 서예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역사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하겠다.
-77~80쪽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이 능비는 고구려 제19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훈적비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란 시호(諡號)는 대왕이 재위 중에 국토를 넓게 확장하였기 때문에 바쳐진 이름이다. 광개토대왕이 개척한 국경은 북으로 송화강(松花江), 서로 요하(遼河), 동으로 연해주(沿海州), 남으로 한강(漢江) 유역에 이른다. 이러한 공적은 모두 이 능비의 비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능비문은 평문서사체(平文敍事體)로 광개토대왕과 관계있는 일의 공적을 서술하였다. 이 비문 중의 적지 않은 기록들에 의해서 우리들은 이전에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 기록들, 예를 들면 광개토대왕의 생몰(生歿)연대·재위 연대·재위 기간 중의 국제 관계, 광개토대왕이 마련한 제도와 법령 등을 수정·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성을 띤 문장에서 우리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 역시 적지 않다. 즉 이 능비문의 제1면 제9행의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경자년기사(庚子年記事) 같은 기록은 우리들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능비의 형식은 방주형사면환각(方柱形四面環刻)비인데 이런 형식은 중국의 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고구려의 독창적인 형식으로 고구려비의 전형을 이룬다. 이런 고구려비의 형식은 고구려의 또 다른 비인 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난다. 또한 이 능비의 형태는 일본 고대삼비의 하나인 ‘산지상비(山之の上碑)’에서도 보인다. 특히 중원고구려비는 마치 광개토대왕릉비를 축소해 놓은 것과 같다. 따라서 이 능비 형식의 전파 과정을 추측할 수가 있다. 이것도 앞으로 충분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능비문의 문자 중에는 이체자와 간체자가 매우 많으며 중국 문자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적지 않다. 이것 역시 이 능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데, 어떤 이체자는 신라와 고대일본의 문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문자체는 웅위하면서도 소박하다. 여기에 당시의 시대 배경이 서로 융합되어 창조된 새로운 품격을 지닌 서체(書體)로써 독창적인 종합서체이다. 즉, 고구려서체라고 말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문화의 금자탑으로써 이것은 고구려역사와 한국 금석학은 물론 서법사상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 서법(書法)상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87~88쪽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이른바 신묘년기사의 해석에 관한 논쟁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는 한·일 사학계의 초점이 되고 있는 바이지만 대개 횡정충직의 석문을 그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문맥상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주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 쟁론은 대체로 “왜”를 주어로 하느냐, 아니면 생략된 “고구려”가 주어이냐, 그렇지 않으면 “倭”자는 부동하는 기정자(旣定字)로 두고 “來渡海破”가 원문과 다를 것이라는 세 가지 설로 크게 나뉘어 왔다.
“倭”자를 그대로 고착시키는 한 이와 같은 여러 설은 지난 백 년 동안에도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백 년 동안에도 미궁의 장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 지난 근 백 년 간에 조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倭”자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심히 위험스러운 시도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증·서술한 것처럼 역사상으로는 “왜”[왜구]가 백제나 신라 또는 가라를 파할 만한 실력을 갖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서법상으로도 “倭”자는 수많은 의문점과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270쪽
필자가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광개토대왕릉비 연구에 있어서 앞으로는 석문에만 의존하는 연구보다는 한·중·일 3국 간의 현지 실물에 의한 과학적인 조사·분석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현재의 형편으로는 탁본에 의한 금석학적(金石學的) 조사·분석에 의한 연구가 당면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 역시 성야양작이 “일본과 대한민국 연구 교류가 보다 왕성하게 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고 천명한 대로 성사되기를 기구하면서, 아울러 현재 보관자인 중국 당국은 직접 당사자인 대한민국의 학자들에게 하루바삐 마음놓고 참관하고 조사·연구할 수 있도록 마땅히 배려해야만 할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제대로 만족스러울 만한 답변을 하지 못한 점은 물론 어느 곳은 미처 언급하지 못한 점도 많다고 생각되나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291쪽
광개토대왕릉비문은 우리나라 고대사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동북아사의 귀중한 금석문 사료임은 말할나위없다. 이렇듯 귀중한 사적이 일찍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고 만주에서 세인의 관심 밖에 있다가 약 100여 년 전에 일본제국주의 육군참모본부 첩자들에 의하여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동북아 국제질서에 중대한 사건의 계기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제국주의 군부와 관학에 의하여 능비문의 판독 작업을 하면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고의로 왜[지금의 일본]에 유리하도록 조작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첫째, 광개토대왕의 재위 원년인 영락 1년[391] 이른바 신묘년기사 중에서 왜에 관한 기사를 삽입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倭”자와 “來渡海”자를 틀리게 새겨 고대일본[왜(倭)]의 역사에 유리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둘째, 영락 10년[400]의 경자년기사에서 “新羅城 城倭寇大潰城”이라고 하는 기사를 “新羅城 城倭滿倭潰城 ”이라고 하여 마치 ‘倭’가 신라 전역에 침입하여 이들 ‘倭’가 신라를 궤멸시킨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왕건군이 소개한 1981년 채탁된 주운대 탁본에는 분명히 “新羅 城倭寇大潰城 ”이라고 탁본되어 있다. 이는 해안 지방의 신라성에 왔던 왜구가 신라〔군〕과 고구려 원군에 의하여 크게 궤멸되었다고 하는 내용으로 주내경신의 쌍구가묵본과는 전혀 상반되는 내용이다.
이로써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왜가 4, 5세기에 백제·신라를 지배하였고, 심지어 낙동강 유역에 왜의 식민지격인 이른바 임나일본부를 두어 한반도를 통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로 인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군부와 관학자들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탈취하는 역사적인 구실을 제공하였다. 이것이 19세기 말의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의 명분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 왜곡이 오늘날까지 일본 국사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322~323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