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동해 바다에서 에게 바다로 떠나면서 나는 그리스 인 조르바가 외쳤던 고함을 내 결심인 양 되뇌었다. “항상 무엇인가를 찬미라하. 찬미야말로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 그리스에서 나는 최소한의 것으로 최대한의 것을 누릴 것이며, 언제나 내 손으로 만드는 음식처럼 나에게 건네주는 음식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맛의 진실을 찾을 것이다.
[프라하]
프라하는 카프카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프라하 자체였다. 그러나 과거의 유산 아
래 현재의 표정을 살피는 일이란 후배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가능한 것. 지금 현재의 현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국을 떠나 끊임없이 두 체제 사이에서 소설을 매개로 서로를 비추어 보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귀향담을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멕시코]
아코디언과 레긴토로 구성된 2인조 악사가 부르는 [베사메 무초],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갔다. 그리고 리듬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여기저기 박수소리가 커졌고, 그럴수록 레긴토와 아코디언 선율이 울창하게 퍼져나갔다. 도대체 나는 무슨 용기로 자리를 박차고 악사들 사이로 끼어든 것일까!
[쿠바]
아바나가 내 가슴에 남긴 여운은 진한 슬픔의 정서였다. 미국과 같은 바다에 면해 있으면서도 이데올로기의 장벽으로 고립된 채 낡고, 녹슬고, 허물어지고, 버려져가고 있는 모습은 자본에 대해, 혁명에 대해, 인간에 대해, 예술에 대해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를 안겨주었다.
[프랑스]
라틀랑티드의 농어구이는 담백한가 하면 뜨겁고, 뜨거우면서 향기로운, 한마디로 사랑스러운 맛이라고 해야 할까. 팡테옹 언덕 아래,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무프타르 골목의 라틀랑티드에서 맛보는 에스카르고와 농어구이의 맛, 내겐 영원히 질리지 않는 담백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파리의 맛이다.
[이탈리아]
내가 꿈꾸는 여행지들은 단테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불멸의 문학예술가가 나고 자라고 활동하고 죽어 묻혀 있는 공간들이다. 그들을 키워낸 하늘과 바람과 공기를 호흡하고, 그 아래 자라는 푸성귀와 열매를 맛보며, 그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문장으로, 또는 색이나 음으로 표현되는 원리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스페인]
언덕을 돌아 넘어왔을 뿐인데, 나는 다른 나라에 와 있었고, 살갗에 와 닿는 겨울 바람이 상쾌했으나 느닷없이 20세기의 비극이 훑고 지나간 정신은 급격히 피로감에 휩싸였다. 나는 잠시 빠져든 낮 꿈에서 깨어나듯, 원래의 계획을 환기했다. 그래, 스페인 국경을 넘어 만나는 첫 마을에서의 점심식사!
[벨기에]
마침내 둥글고 깊은 탕기 가득 김을 모락모락 일으키며 물 마리니에르가 도착했다. 화이트 와인에 양파와 당근, 바질로 우려낸 국물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검은 갑옷 사이로 주홍색 속살을 내보이며 수줍게 벌어진 홍합 한 점을 조심스럽게 떼어 혀끝으로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바다 특유의 짠 맛이 흐르고 흘러 빠져나간 끝에 백포도주와 양파와 바질이 만나 절묘하게 우러난 맛이라니!
[아일랜드]
이니스프리 호수는 명성에 비해 평범했다. 이니스프리라는 이름에 홀려 굳이 지구 반 바퀴를 날아갈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호수는 주위에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호수라고 다 같은 호수는 아니었다. 아무리 눈앞에 펼쳐진 호수가 특별할 게 없어 보여도 예이츠가 소박한 삶의 이상향으로 호명한 순간 그것의 운명은 달라졌다.
[미국]
21세기 현대 예술의 메카인 모마에서 한나절을 보낸 뒤, 인근 세인트 패트릭스 교회와 5번 애비뉴의 풍경을 스케치한다. 또는 지금처럼 월드트레이드센터 역에 하차한 경우, 인근 트리니티 교회에 들렀다가 길을 건너 월스트리트를 곧장 걸어 뉴욕 만으로 이어지는 시포트까지 내처 나아간다. 등대, 범선, 바다 냄새, 물결치는 생동감을 느끼고 싶어서다.
[헝가리]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비극의 참상이 먼 이국에서 온 이방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데, 매일 눈 뜨고 상처를 맞닥뜨리며 살아가는 현지인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루카치를 좇아 강을 건너갔으나, 루카치보다는 부다페스트의 속살을 얼핏 본 느낌이랄까. 학생식당 야외 파라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파괴에 대해 생각했다.
[터키]
나는 어떤 향기를 맡았던가. 기억이 없었다. 내가 잠든 사이 코 끝 위로 살짝 흘러간 것일까. 동방의 빛을 찾아 콘스탄티노플까지 흘러온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르가 말하길, 적어도 6개월은 머물러야 이스탄불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고 토로하지 않았던가. 6개월이라니, 내가 이스탄불에 머무는 시간은 겨우 사흘. 나는 이스탄불의 무엇을 보고 갈 것인가.
[페루]
북반구의 서울에서 남반구의 페루에 가기 위해서는 북태평양을 건너 캐나다를 경유, 미 대륙과 중남미를 거쳐 남미로 진입하는 간단치 않은 여정이었다. 로맹 가리의 소설『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인해 페루라는 이름이 거느린 독특한 아우라, 곧 치명적인 낭만성을 현장에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네팔]
진행 방향 멀리 산자락과 산자락이 더이상 겹치지 않는 허공에는 석양에 비친 구름이 그림처럼 걸쳐져 있었다.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순진한 의문이 솟았고, 내 귀를 싱그럽게 또 내 마음을 그럴 수 없이 편안하게 어루만져주는 물소리의 근원이 히말라야 만년설이니, 저 너머에는 안나푸르나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구름 속에 잠시 가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필로그-부산 청사포]
소설가에게 삶은 허구(창작소설)의 기반이다. 삶을 벗어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특히 문학은 거기에 가장 정직하게 조응하고자 애쓰는 작업이다. 그 중심에 음식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청사포 지천에 낮게 퍼져 자라는 싱싱한 방아와 그 아래 심해에서 힘차게 유영하는 바닷장어는 청사포만의 선물이자 축복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