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이 더 지났다. 공항에 갇혀 있는지 5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쯤 이민성 직원이 돌아왔고, 난 이미 망친 시험결과를 받아보는 마음으로 직원을 쳐다봤다.
예상과는 다른 점수가 나왔다. 이민성 직원은 우리가 3시간 이상을 잡아두고 다시 입국시켜주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면서 안에 가서 가방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나에게 일을 제공해주었던 백팩커의 주인이 내가 그 백팩커에서 지낸 것을 증명하는 자료를 팩스로 보냈고, ‘내가 그곳에서 3개월간 일을 했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보장했다는 것이다.
(…)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 흔한 땡큐 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울상이 됐던 얼굴을 다시 펴지고 가방을 메고 나오자 이민성 직원이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you are unbelievably lucky guy”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그 말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
퍼스공항을 나왔을 때 내 신용카드는 정지돼 있었고, 전화기는 불통인데다 주머니엔 호주 돈으로 10불 정도가 있었다. 도시로 가는 버스는 25불, 택시는 30불이었지만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걸어서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다행히도 난 지푸라기를 잡았으니까. 그리고 다시 걸을 수 있었으니까.
--- p.114
말 그대로 이등병의 상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다 심리적 긴장상태는 최고조였으며, 그들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난 정신이 나가 있었다.
(…)
늘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못하는 신참들은 일이 안 풀리는 모든 것에 대한 불평거리가 돼야 한다.
아무리 이를 갈고 미친 듯이 따라가려 해도 내 손은 난생처음 보는 불쌍한 모양으로 벗겨지고, 찢어지고, 상처가 나고 있었고, 내 발에 잘 맞지 않는 젖은 장화 때문에 장딴지의 살은 썩어 들어갔다.
심지어 일을 시작한지 며칠 만에 안경을 잃어버려서 잘 맞지 않는 예비 안경으로 일을 해야 했으며, 그러다 그물과 철 사이에 손이 껴서 손가락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붓기도 했다.
더 힘들었던 건 그 손으로 30분 뒤에 다시 그물을 잡기 위해 훅을 던져야 했다는 것이다.
(…)
내 상황이 거짓말 같았고,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저 안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느새 내 머릿속은 이 바다 위에서, 이 배 위에서 그저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2주 가까이 시간이 흐르고 달이 차기 시작했다.
피슁잡은 3주간 배 위에서 일하고, 육지로 돌아가 일주일간 휴식을 취하고, 다시 3주간 배 위에서 일하는 형식으로 6개월 동안만 이루어진다. 보름달의 주기로 출항의 여부를 정하기 때문에 달이차고 있다는 건 시간이 흐르는 것과 동시에 배에서 내리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별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눈은 오직 달만을 쫒고 있었다.
--- p.126~127
나는 만으로 25살에 몇 개의 나라와 도시들을 여행하고, 여행에 대해 뭐라도 아는 것 마냥 존에게 여행을 이야기했다.
아니 지껄여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바보 같아 보일 수 없었고,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
무슨 사정이 있어서 여행을 하는 사람처럼, 무언갈 찾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의미부여에 취해서, 특별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 혹은 그 어떤 목적의식도 모두 잃어버린 상태에서 난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쳤다.
(…)
그리고 난 나를 지나친 어떤 사람에게도 무언갈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걷고 있기 때문에 그럴 여유 따윈 없고, 당연히 당신들이 나에게 무언갈 보여주고 주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면서 나를 꽁꽁 싸매고 누군가에게 작은 병을 줄 여유조차 부리질 못했다.
존은 이제 20살에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바보 같은…….”
꽉 막힌 것 같은 무언가가 뚫린 기분이었다.
(…)
이제라도 존을 만나서 그 작은 병을 받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 p.230~231
그래서 난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해야 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의 안쓰러운 모습에 난, 화를 낼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심지어 장례식이 진행되는 3일 동안 그다지 울지도 못했다.
(…)
그리고 장례식의 마지막 날, 난 가족들을 대표해서 아버지의 뼈가 갈아지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가장 돌아가기 싫은 기억의 정점이 되어버린 그 순간.
(…)
내 눈앞에서 아버지가 가루가 되는 그 몇 분 동안 난 모든 걸 보상받으려는 듯 목 놓아 울었고, 그 이후론 단 한 번도 아버지 생각으로 울지 않았다.
(…)
시실리 섬이 그 두 번째 장소가 될 줄은 몰랐다.
도망치려고 떠나온 길목에서 마주친 그 기억은 잠깐이지만, 큰 눈물을 맞이하게 했다.
(…)
그래도 이번엔 혼자 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이어서,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아서, 마음 놓고 울어버릴 수 있었다.
(…)
울고 나니 한껏 후련해졌다.
마치 목 놓아 울기 위해 길을 떠나온 사람마냥,
하루 종일 이빨에 낀 무언가를 잠자기 전에 뺀 사람 마냥…….
신나게 울고 나니 배가 고파져서 호스텔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이고이 아껴뒀던 라면을 꺼내서 끓이기 시작했다.
(…)
중학교 때쯤인가 독서실에서 밤늦게 돌아오면 깨어 있던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랑 라면을 끓여먹었었다.
“우리 아버지가 라면하나는 정말 기똥차게 잘 끓이셨는데”
(…)
배가 많이 고팠었는지 그날 라면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 p.253~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