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의 싸움이란 결국 정신적 극기와 육체적 절제를 강요하는 전통윤리와의 싸움이요, 금욕주의와의 싸움이다. 진정한 행복은 운명과의 싸움을 통해 얻어지는 드라마틱하고 긴장감 넘치는 ‘재미’로부터 온다. -「운명이란 무엇인가」(22쪽)
원칙적으로 기독교는 인간의 행, 불행이 인간의 선행이나 악행과는 무관하게 무조건 여호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불행이 사탄의 유혹에 빠진 죄과罪果 때문이라는 보조적 원인을 설정해놓음으로써 모든 불행의 책임을 인간에게 덮어씌우고 있다. ― 「예수는 유일신에 의한 운명결정론을 거부했다」(50쪽)
예수가 가장 자신있게 운명극복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는 대다수 인간의 불행한 운명이 죄의식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했다. 유태교든 기독교든 교리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역시 원죄론(原罪論)인데,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원죄론에 따른 쓸데없는 죄의식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 「기독교의 운명관」(59쪽)
불교는 끊임없는 도전과 변신의 종교요, 역설의 종교다. 예수가 민중들에게서 원죄의식을 없애주려고 애썼다면 석가는 업보(業報)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려고 애썼다. 또한 석가는 「가족관계로부터의 과감한 탈출」이야말로 우리가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비결이라고 제시해주었는데, 기존의 지배이데올로기적 윤리에 묶여 있는 가족관계야말로 우리를 운명의 꼭두각시로 만들어가고 있는 원흉이기 때문이었다. ― 「불교의 운명관」(98쪽)
공자의 역사관이 갖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그것이 과거지향적인 것이었다는 데 있다. 현재보다 옛날이 좋았다는 역사인식은 퇴영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와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새로운 건설욕구를 여지없이 위축시킨다. 그것은 인간 개개인을 봐도 마찬가지다. 흔한 비유로 맥주를 반 병 마셨다고 할 때, 과거지향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맥주를 반 병이나 마셨다'고 말하며 찌뿌둥해하는 반면, 미래지향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맥주가 반 병이나 남았다'고 하며 환한 표정을 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 「유교와 도교의 운명관」(112쪽)
도교사상이 보여주고 있는 운명극복법은 결국 「현세적 도덕률로부터의 탈피」와 「상상력을 적극 활용하라」로 요약될 수 있다. 유교사상이 평민들의 신분상승욕구를 억눌러 계층간의 위계질서를 엄격히 함으로써 사회기강 확립을 도모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도교에서는 스스로가 처한 상황이나 신분에 만족하지 말고 보다 더 높은 것, 미지의 것을 향해 과감히 도전하라고 주장했다. … 「인간은 언제나 그가 생각하는 상태대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운명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명제다. 여기서 「생각」을 「상상」으로 바꾸면 더 좋을 것이다. ― 「유교와 도교의 운명관」(127쪽)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 역사시간을 통해 백제 말 계백장군의 지극한 충성심에 대해서 배웠고, 계백장군이 5천명의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 전투에 나가면서 자신의 가족을 모두 다 미리 죽여버린 사실까지도 긍정적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교육받았다. 계백장군의 행동은 과연 올바른 것이었을까? 자기의 가족들이 신라군사들에게 잡혀 치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먼저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은 어디까지나 계백장군 개인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가족들이 나중에 폼나게 자살을 하든 비굴한 생존을 택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족 개개인의 실존적 판단에 맡길 문제였다. ― 「가족관계와 운명」(136쪽)
예술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되 솔직한 본능에 맞춰 추구하는 것이고, 부질없는 죄의식이나 위압적 도덕률에 굴하지 않고 상상적 창조행위를 통해 진부한 사회규범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곧 「금지된 것에의 도전」이 바로 예술성의 핵심인 바, 이는 수구적 봉건윤리와 위선적 가치규범을 혁파(革破)하여 누구에게나 진정한 자유가 보장되고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는 민주적 복지지상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공적 길몽’과 운명」(175쪽)
「역설적 의도」란 역경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거꾸로 생각하여 밀고 나가라는 말인데, 제일 좋은 예를 불면증의 치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잠이 안 올 때는 억지로 잠을 청하지 말고 일부러 잠을 쫓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앉아서 책을 읽든지 일을 하든지 말이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쓰러져 저절로 잠이 들게 되는 것이다. 수면부족과 불면에 대한 근심은 잠들고자 하는 「과잉의도」를 가져오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잠을 빼앗게 되기 때문이다. ― 「햇볕이 뜨거울 때 우산을 쓰면, 신기하게도 비가 내린다 - 주역의 운명대처법」(195쪽)
성과 정치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 기득권 지배층에 의해서 선전된 도덕과 윤리는 다분히 금욕주의적 측면에 치중된 것이었다. 국민 개개인의 금욕주의적 인식이 강해질 때 거기서 반드시 「복종의 미덕」이 생겨나고, 아울러 「인내심의 함양」이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소수의 지배계층은 이성우월주의에 입각한 「엘리트 독재」를 합법적으로 자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쾌락으로서 성을 부끄럼없이 향유하라 - 성과 운명」(250쪽)
관습적 사고란 곧 폐쇄적 사고를 가리키는 것이고, 폐쇄적 사고야말로 인간을 체념적 운명론에 빠뜨리는 주된 요인이 된다. 그런데 관습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들은 대부분 종교?도덕?윤리?철학 등과 유착돼 있어, 터무니없는 권위를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폐쇄적 사고는 결국 권위주의적 사고의 형태를 띠게 된다. ― 「관습적 사고와 운명」(256쪽)
민심을 제대로 읽어내기가 왜 어려운가 하면, 막연한 상태로 존재하는 민중 개개인의 잠재의식을 상징적으로 대변해주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인데, 대중문화를 포함한 모든 문화의 흐름을 표면적으로 주도하는 것은 역시 보수기득권자들의 논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설사 진보주의자인 체하는 지식인들이라 할지라도 엘리트 독재주의자인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에, 진짜 민심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한다. ― 「놀이와 운명」(320쪽)
우리가 「어린아이」 같은 마음과 감성으로 야한 광기(狂氣)를 불태울 수 있을 때, 우리는 갖가지 인생의 굴곡과 풍파들을 「권태를 방지해주는 놀이」로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생(生)에 권태를 느끼고 그것이 절망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우리는 게임 중간에 좌초하고 만다. …행복한 운명은 인내와 절제에 있는 게 아니라 관능적 열정과 순진한 떼쓰기에 있다. 왜냐하면 운명은 야(野)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솔직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우리의 육체적 본성이 갖고 있는 솔직한 욕구에 따라 정직한 기계처럼 움직인다.
― 「놀이와 운명」(3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