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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안식월

런던의 안식월

: 이승민 소설

이승민 | 바람 | 2014년 10월 2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0 리뷰 3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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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10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328g | 132*210*15mm
ISBN13 9791195163526
ISBN10 119516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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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이승민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월간 럭셔리(LUXURY) 피처 에디터, 노블 에셋(Noble-Esset) 편집장 등 여러 잡지 매체 기자를 거쳐 현재는 콘텐츠 기획자로 활동하며, 소설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2014년 런던의 안식월로 제1회 K-오서 어워즈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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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 체크인을 하는 동안 그는 차에서 여행 가방을 가져왔다. 10년 전 한국으로 돌아갈 때 들었던 낡은 트렁크였다. 데런은 진작 재활용 분리수거함으로 들어갔어야 할 녀석을 내려다보며 잠기는 게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여기저기 긁히고 찌그러져 있는 트렁크는 나만큼 낡고 지친 행색이었다. 녀석에게 묻고 싶었다. 넌 이곳이 인혜와 함께 살았던 그곳이라는 게 믿겨지느냐고. 10년 만에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를 실감하겠느냐고.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바퀴에서 연신 쇳소리가 났다.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어서 구차스러운 가방으로서의 운명이나 끝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다. 이번에도 나는 외면한다. 아직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
_런던의 안식월 중 20p

티베트인 시위에는 피켓을 들고 행진에 참여하기라도 했지만 동성 결혼 합법화 시위 때는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것이 전부였다. 쳰은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가 자신들이 없애고자 하는 딱 그만큼의 거리라고 했다. 솔직히 드랙퀸이나 반라 차림도 이 거리감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얘기하자 쳰은 제발 데런을 닮아가지 말라고 말했다.
런던에 온 목적이 조금씩 희미해질수록 두려움은 불쑥 더 거세게 고개를 들곤 했다. 그것은 이곳에 온 목적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경고 같았다. 시위대를 따라가는 동안이나 갤러리에서 쳰과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을 때, 혹은 데런과 향수 노트에 대해 얘기할 때는 별다른 감정이나 상념이 끼어들지 않았다. 데런은 두려움보다 외로움이 더 커지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고, 쳰은 두려움이나 외로움 모두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의미라고 말했다.
_런던의 안식월 중 80p

그리고 아무 연락도 없었다. 결국 저울은 쳰이 보여주었던 희망적인 반응보다 냉소적이었던 데런의 반응 쪽으로 기울었다. 기다림이 두려움으로 옮겨가려 할 때마다 나는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런던 거리를 정처 없이 쏘다녔다. 밀레니엄 브리지에서 한 시간 동안 템스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에게 경찰이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보고 가기도 했다. 리치몬드 파크에서는 말없이 사슴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동네 주민이 신고했다. 같은 자리에서 한 시간 동안 사슴을 구경한 사람이 내가 처음이라는 게 신고 이유였다. 다행히 런던 경찰은 친절했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준 후 내가 타인의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이해시켰다. 다음부터는 한 시간 동안 사슴을 보지 말라는 이상한 당부도 했다.
_런던의 안식월 중 125p

5호 감정실 안은 사방 벽과 천장, 테이블과 의자까지 모두 백색이어서 원근감이 사라진 평면 공간처럼 다가왔다. 백색과 백색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명암 차이에 눈이 적응하자 테이블 저편으로 나란히 앉은 감정위원 세 명이 보였다. 모두 1년 전에 보았던 치들이었고, 가운데 앉은 대머리 감정위원은 벌써 3년째 보는 얼굴이다. 세 사람 다 흰색 유니폼을 입고 있어 보호색을 띤 것처럼 보였다. 눈을 찌푸릴 만큼 부시게 내리쬐는 조명은 엄호사격보다 위압적인 기세로 그들을 수호하고 있었다.

- 기록 코드 1184번. 남편 김민기 씨, 아내 전혜리 씨. 부부 경력 5년. 최종 감정일 작년 10월 9일. 맞습니까?

백색 벽보다 더 하얀 얼굴을 지닌 왼편 감정위원이 기계적으로 차트를 읽었다. 지금 곧장 관 속으로 들어가도 될 만큼 혈색 없는 낯빛이었다. 나는 서둘러 ‘네’라고 대답했고, 아내는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감정위원들 앞에서도 주눅 드는 법이 없는 아내가 처음에는 존경스러웠고 나중에는 불안했고 가끔 걱정됐다.
_감정 중 168p

귀찮고 번거로운 절차이긴 하지만 해마다 연례행사를 치를 때면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기도 한다. 정기 감정 때마다 감정위원은 늘 똑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두 분 모두 기혼 계급으로서 품위와 책무를 굳건히 지킬 것을 서약한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까? 결혼조약백서 위에 손을 얹은 남편과 아내는 가장 순결한 표정으로 ‘예’라고 답한다. 나는 그 의례적인 행위가 주는 신성한 자극에 매번 놀라곤 한다. ‘예’라고 답하는 순간 진정 기혼 계급으로서의 품위와 책무를 굳건히 지켜왔는지, 결혼식을 올리던 당시의 다짐에 정말 변함이 없는지 냉정히 되돌아보게 하는 매우 간단하고도 강력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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