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로트만이 말한 2원 모델의 개념이 텍스트를 대하는 독특한 러시아적 태도(“책에 따라 살기”)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어정쩡한 중간 항, 절충과 타협의 결과로서의 제3항을 거부하는 그들의 입장은 삶과 예술의 경계, 책과 현실 간의 거리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그들의 태도와 맞물려 있다. [……]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것’에 머물지 않고 직접 그들을 ‘따르려는’ 삶, 그 실험적 삶이 동반해야 했던 온갖 구체적인 고통들을 생각했고, 구세계를 밑바닥까지 파괴한 후 그 폐허 위에서만 새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2원 모델이 러시아의 역사에 남긴 지속적인 상흔을 떠올렸다.
--- p.19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듯,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화보다는 오히려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쉬워진” 오늘날, 다시 새롭게 “유토피아를 발명”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크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금 곱씹게 되는 것은 러시아의 역사를 관통해온 저 도저한 원칙주의의 태도다. 문학을 대하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특징을 지적하면서 이사야 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러시아인들의 공로로 생각하는 부분은 대단히 윤리적인 그들의 태도이다. 삶과 예술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서로 일치하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윤리적이다.”
--- p.20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책에 따라’ 살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는 유토피아적 이념의 현실화는커녕 유토피아의 가능성 자체를 믿지 않게 된 것처럼 보인다. 부분적인 보완과 개선은 가능할지라도 현실의 근본적인 변혁이란 절대 불가능하며, 그런 변혁의 시도는 더욱더 끔찍한 파국과 불행(가령, 파시즘)을 가져올 뿐이라고 굳게 믿게 된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 p.21
일찍이 로트만은 18세기 러시아 문화의 맥락 속에서 문학의 역할과 위상을 논하는 한 저술에서, 당대의 문학과 독자들의 관계 양상을 “책에 따라 살기”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그는 당대의 문학 텍스트가 현존하는 실제 독자가 아니라 이상적으로 구축된 독자의 형상을 지향했으며, 또한 실제 독자들 역시 이런 이상화된 모델을 일종의 규범으로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에, 사실상 “독자들에게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책에 따라 살 것이 요구되었다”고 주장했다.
--- p.23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작은 인간’(가령,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주인공 제부슈킨)은 같은 계급의 프랑스인과 달리, 사회적 신분의 상승을 꿈꾸지 않는다. 그 대신 그가 꿈꾸는 것은 훌륭한 글쓰기(의 재능)이다. 러시아에서 작가는 언제나 일종의 비공식적 권력, 말하자면 ‘두번째 정부’로 간주되어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의 통치자들(예카테리나 2세부터 레닌에 이르기까지) 역시 부단하게 스스로를 문학가로 표상하려 시도해왔다. 레닌은 문학비평가, 스탈린은 언어학자였으며, 흐루쇼프는 현대예술 비평가였고, 브레즈네프는 직접 소설 3부작을 썼던 작가였다.
--- p.25~26
라디시체프의 수수께끼 같은 자살이 공포로 인한 맹목적 선택이 아니라 오랫동안 숙고된 ‘지성적 행위,’ 곧 나름의 ‘저항 방식’이었다는 점을 밝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반드시 애디슨의 비극 『카토』라는 코드(모델)를 경유해야만 한다. 황제와의 독대 이후 많은 이들의 예상을 거스르며 돌연 퇴직했던 차다예프의 행위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밝혀내려면, 그가 ‘러시아의 포자 후작’(실러의 비극 『돈 카를로스』의 등장인물)을 연기하려 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고작 석 달을 함께 산 남편을 따라 고된 시베리아 유형에 함께했던 12월 당원의 아내 마리야 볼콘스카야의 이해하기 힘든 행위 역시, 그녀가 릴레예프의 시를 읽고 거기서 제시된 영웅적 행위 프로그램을 따르고자 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온전히 해명된다.
--- p.33
18세기 러시아 근대 문학의 시작과 함께 나타난 이 태도는 낭만주의-리얼리즘-모더니즘을 거치면서도 일종의 불변적 항수로서 ‘유지’되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 문학의 유기적 성장과 더불어 점점 더 강화되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애초에는 일정 정도 비유적인 양상을 띠었던 ‘책에 따른 삶’이라는 행위 모델이 러시아 모더니즘의 끝자락(미학적 아방가르드)에서 가장 극단화된 형태로 탈바꿈하는 것, 말하자면 그것의 ‘글자 그대로’의 실현을 마주하게 되는 일은 지극히 의미심장하다. 세기 전환기에 전 유럽을 물들였던 ‘끝’과 ‘시작’에 대한 첨예한 감각이 마침내 눈앞에서 현실화된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 ‘새로운 문화’의 창조라는 명제는 더 이상 예술 운동의 영역에 한정된 미학적 구호가 아니었다.
--- p.34~35
그렇다면 문제는 ‘예술 텍스트의 프리즘을 통해 삶을 바라보려는’ 이런 독특한 지향과 의도가 실제로 해당 시기 인간들에게 가져다준 결과, 다시 말해 이런 태도가 수반했던 문화적 ‘기능’이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일이다. 예술적 잣대를 통해 삶을 바라본다는 것, 삶 속에서 예술을 ‘산다’는 것은 18~19세기 초반의 러시아 귀족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을까? ‘삶이 예술을 서둘러 모방했던’ 이 시기 인간들은 일상적 삶을 “마치 무대 위에 선 것처럼” 살아갔다. 무대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의식적으로 ‘연출’해낸다는 것, 자신에게 특정한 ‘배역’을 부여하고 그 자신이 ‘등장인물’이 됨으로써 결국 스스로의 삶을 ‘플롯’을 지니는 것으로 ‘창조’해낸다는 것을 뜻한다.
--- p.34
1977년에 우스펜스키와 함께 발표한 「러시아 문화의 역동적 전개에서 이원적 모델의 역할 」에서 로트만은, 중세로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러시아 문화사의 전개를 원형적 모델의 역동적 변형 과정으로서 제시한다. 이때 원형적 모델이란 원칙상 대립되는 두 문화 영역, 즉 성聖과 속俗의 ‘양극적 배치’로서 실현되는 중세 러시아 문화의 ‘2원 구조’를 가리킨다. [……] 하지만 러시아 중세 문화의 이런 특징은 독립된 자족적 실체라기보다는 그에 대립하는 서구적 유형과의 유형학적 비교의 산물이다. 중세 러시아 문화의 원칙적인 2원론, 즉 ‘천국 대 지옥의 2원 구조’는 서구 가톨릭 세계의 ‘3원적’ 세계 모델(천국-연옥-지옥)과의 비교를 통해 모델화된다.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의 중간 단계인 연옥을 지니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러시아 문화의 2원 구조가 의미화되는 것이다.
--- p.106~107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의 정점이자 가장 잘 알려진 무대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다. “7월 초순, 굉장히 무더운 저녁 무렵에 한 청년이 S골목의 세든 조그마한 자기 하숙방에서 한길로 나와, 뭔가를 망설이듯 천천히 K다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죄와 벌』은 페테르부르크가 만든, 그리고 페테르부르크에 바쳐진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테르부르크의 빈민가 센나야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거리를 한 청년이 걷고 있다. “벌레만도 못한” 인간인 전당포 노파의 집에 당도하기 위해, 그는 정확히 730보를 걸어간다. 찌는 듯이 덥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한 악취가 풍기는 거리, 라스콜리니코프의 위대한 망상과 살인은 바로 ‘이 거리에서’ 생겨나고 실행되었다. 『죄와 벌』은 19세기 러시아 대도시의 실상에 관한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한 사회적 기록이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빼어난 임상보고서이다._182쪽
로트만은 나-나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적 특성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번째는 “말을 축약하려는 경향”이다. [……] 그와 같은 압축형이 전달되는 메시지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을 때에만 해독이 가능한 일종의 ‘지표적’ 암호의 성격을 띠게 되리라는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의 원칙은 “알아볼 수 있는 사람만 알아보게 하라”인 것이다. 이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가 바로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사랑 고백 장면이다. 남자 주인공 레빈은 문장을 이루는 단어들의 앞 글자만을 사용해 사랑을 고백하는데, 여주인공 키티는 단박에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 에피소드가 상징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것은 키티와 레빈이 이미 정서적으로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 사실상 자기커뮤니케이션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p.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