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세 200여 년간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우리는 인류가 누려온 모든 절기를 포기하고 출근과 퇴근, 평일과 휴일로만 시간을 산다. 시간을 사는 인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표대로 움직인다. 여기에 우주적 시간표는 없다. 그럼에도 태양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물체들은 째깍째깍 울리는 시간 속에서 각자의 생체 시계를 간직한 채 오늘도 살고 있다. 우주의 시계방에 가득 걸린 시계는 각기 크기도, 생김새도, 쓰임새도 다르다. 그들이 가리키는 시간도 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시계들은 모두 다 잘 돌아가고 있다. 모든 시계는 고유의 시간을 가리키며 정해진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이제 보아라, 살아 있는 동안이 그대의 인생이다.
---「우주의 시계방에 걸린 시계들은 모두 잘 돌아가고 있다」중에서
● ‘경복궁 처마에서 수학 읽기’를 하거나, ‘수학으로 동화 읽기’ 차원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기호논리학으로 풀어보고, 또 음계 속에서 수학적 요소를 찾아보는 것들은 기존의 방식과 다른 통합적 사고를 가져온다. 따라서 그 자체로 창의적이다. (…) 이른바 ‘스펙사회’는 이 모든 가치를 압살할 태세로 목전에까지 밀려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 대학에서는 인문학과가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다. 누가 이 같은 암전 상태로 학문을 끌고 가는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창의를 만들어내는 힘」중에서
● 햄버거 하나를 생산하는 데에 3000리터의 물이 필요하고, 밀크셰이크 한 잔을 생산하는 데에는 1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밀크셰이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우유 1리터를 생산하는 데에는 2000리터 이상의 물이 들어가고, (…) 인간이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더 오래도록 살려면 지금보다 훨씬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엄청난 거리, 석유 자원, 물발자국은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대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가 지구를 망친다」중에서
● 유전자 조작과 방부제에 절은 수입 밀도 문제지만, 우리 풍토에 적응한 곡분으로 빵을 만들어 먹을 때 느낄 수 있는 맛도 누리기 힘들다. (…) 터키에서는 피자를, 유럽에서는 파스타나 마카로니를, 한국에서는 ‘3천 년 빵’을 먹어야 할 이유는 뚜렷하다. 이 땅이 우리 거라고 주장하려면 여기서 자라는 것들과 무관한 듯 행동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부와 기업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온갖 글로벌주의로 치장하며 우리 것을 말살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터키에서는 피자, 유럽에서는 파스타, 한국에서는 ‘3천 년 빵’을 먹어야만 하는 이유」중에서
● “이 자동차를 타기 싫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만드는 풍요로운 체제를 거부하는 거요.”
일테면 이런 식의 저항할 수 없는 하나의 공고화된 이념을 만들어 내고 이를 프로파간다화한 것이다. 이 같은 발상은 20세기에서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적지 않은 자본주의의 여정 동안 포디즘(Fordism)이 함의해 왔던 성과와 그 이면의 모든 것들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갈등의 근간이 되고 있다. 지구 상 대부분 인간들이 하나의 부품으로서 자기 앞에 밀려오는 수많은 부품들을 다루기 위해 매일같이 컨베이어벨트 앞에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돼지고기 도시’가 만들어 낸 전혀 다른 세상」중에서
● 최근 뉴욕을 방문한 한 지인은 월가의 패스트푸드점에서 다소 높은 가격의 샌드위치가 ‘투고’되고 있다고 전했다. 몰려드는 객장 주문과 고객 문의로 점심시간을 길게 낼 수는 없지만 더 나은 음식을 먹고자 하는 주머니 사정이 반영된 것이다. 그야말로 ‘길거리 경제학’이다. 경제 흐름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지만, 이렇듯 눈에 보이는 경기선행지수를 통해 삶의 현장에서 경기 흐름을 익힐 수도 있다. 세상을 폭넓게 읽는 방법 중 하나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경제 현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세상의 속살이 중층적으로 보인다.
---「길거리 경제학: ‘길보드 차트’를 유심히 볼 것!」중에서
●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란 유럽과 미국에서 원거리 편지 교신으로 지식과 감성의 공감대를 형성해 온 문화적 공동체를 지칭한다. (…) 이때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17, 18세기 유럽과 미국의 계몽주의 인사들이다. 이들은 원거리 편지 교환을 통해 당대의 지성으로서 지식과 감성을 서로 나눴고, 교류의 폭을 점차 확장시켜 문화·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 e메일이 없던 시절, 당대 사상을 대표했던 유명 인사들의 편지는 그 자체가 역사적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상의 특정 시간대에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의 수·발신 위치를 세계지도 상에 표시하면 세기를 바꾼 사상의 흐름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서신은 배편으로 전 세계 수신인들에게 가닿았고 세대를 초월해 공유되었다.
---「‘편지 공화국’과 ‘런던 라이브’를 아시나요?」중에서
● “현실은 죽여야 창조할 수 있다.”
생각이 아닌 행동만이 세상을 바꾼다. 철학적 삶은 행동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지금처럼 결의와 행동에 굼뜨다가는 청신한 나무가 썩어갈 뿐 아니라, 썩은 나무가 눈앞에서 자라나는 꼴마저 보게 될 것이다. 혁명 없이는 결코 혁명을 낳을 수 없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철학적인 삶을 살 순 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