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역사학자” “이 시대 최고의 문제적 작가 중 한 명이다” “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아우르는 파워라이터” “굴절된 역사관을 정확한 근거와 관련 사료를 바탕으로 뒤집어낸다” “역사책을 찾는 독자라면 그를 피해갈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역사 전공자이자 저술가인 이덕일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식민사학 극복과 역사 대중화의 길을 개척해왔으며, 한국사의 원형을 근원에서 재정립하고 있는 역사가이다. 엄정한 1차 사료 검증으로 역사 이면과 맥락을 드러내고, 미래를 향한 현재적 가치를 탐구해왔으며, 성역 없는 비판과 토론으로 열린 역사학을 지향하고 있다. 1997년《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이성계와 이방원》《정도전과 그의 시대》《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조선 왕 독살 사건 1, 2》《이회영과 젊은 그들》《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 1, 2》《조선 왕을 말하다 1, 2》《윤휴와 침묵의 제국》《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사》《근대를 말하다》《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등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치열하게 모색한 50여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식민사관 척결과 21세기 한국을 이끌어갈 신주류 사학의 정립을 위해 애쓰고 있다.
명나라 의종毅宗은 이자성의 군대가 자금성으로 밀려들자 “나의 백성이 괴로움을 당하는구나苦我民耳”라고 탄식하고 태자와 영왕永王, 정왕定王은 명明의 재건을 위해 보냈다. 그런 뒤 황후 주씨周氏와 후비들을 자결시켰다.《명사明史》'장평長平 공주 열전'은 의종이 장평 공주를 찾아가 “너는 어찌 내 집에서 태어났느냐?”라면서 내리쳐 왼쪽 팔이 끊어졌다고 전한다. 의종은 여섯 살 소인昭仁 공주마저 벤 후 자결했다.《명사》'장렬제莊烈帝 본기'는 의종이 “짐은 죽어서 조종祖宗을 볼 면목이 없으니 관을 벗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라”라고 유언했다고 전한다. 복명復明 운동이 끈질겼던 것은 의종의 이런 장렬한 최후 때문이기도 했다. --- p.21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는 고려의 지방 제도를 서울을 뜻하는 개성부開城府, 경기京畿와 5도道 양계兩界라고 서술하고 있다. 나라 서북방의 서북계西北界와 동쪽의 동북계東北界, 그리고 나머지 5도 체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외에 계수관界首官이라는 특수한 지방 조직이 있었다. 조선 초까지 존속했던 계수관은 지방의 중심이 되는 대읍을 뜻한다. 관하에 영군領郡, 영현領縣, 속군屬郡, 속현屬縣을 갖고 있는 경京, 목牧, 도호부都護府 등이 바로 계수관이다. 이 계수관은 고려 후기에 약 34개소가 있었는데, 도와 군현의 중간쯤 되는 지방 조직이었던 셈이다. 지방 행정 체제 개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기형적인 중앙 비대 현상을 해소하고 지방을 살리자는 의도일 텐데 계수관을 비롯한 우리 역대 지방 행정 조직의 역사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 p.121
조선 영조 때 실학자였던 유수원柳壽垣은《우서迂書》에서 상공업 진흥을 외쳤다. (……) 유수원은 먼저 “작은 것은 큰 것에 통합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예속되는 것이 사리상 떳떳한 일”이라면서 형세의 강약을 인정했다. 그러나 “부상富商은 반드시 세약소민細弱小民, 서민의 힘을 얻어야 액점額店, 회사을 개설할 수 있다. 부상이 혼자서 경영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요즘 말로 대기업과 협력 하청 업체의 공생을 주장한 것이다. (……) 유수원은 이 주장이 세상에서 쓰이지 못할 것을 알고 자신의 책을 우활迂闊, 현실성이 떨어짐하다는 뜻의《우서迂書》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했던 신분제 철폐 등은 지금 모두 실현됐다. 승자 독식의 금융 자본주의의 폐해로 전 세계가 신음하는 지금 300여 년 전 조선 선비 유수원의 공생공영의 지혜가 돋보인다. --- p.177
고구려 장수왕은 재위 24년(서기 436년) 요령성遼寧省과 하북성河北省에 걸쳐 있던 북연北燕의 소성제昭成帝 풍홍馮弘이 도움을 요청하자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화룡和龍, 요령성 조양朝陽까지 보내 맞아들였다. 소성제의 정적이었던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의 송환 요청도 거부했다. 고구려는 망명객 수용이 국가의 강성함을 보여주는 증표임을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너무 어렵다는 보도가 있었다. 정치적 망명자는 인권은 물론 우리 사회의 정치적 자산의 일부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다. --- p.235
지금은 까마귀가 흉조凶鳥이지만 과거 선비들은 그리 보지 않았다. 까마귀는 크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주는 반포지효反哺之孝를 행하는 효조孝鳥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규보李奎報는 '하일즉사夏日卽事'에서 “지붕 위에 까마귀 효자가 우네屋烏帝孝子”라고 노래했다.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는 '자오야제慈烏夜啼'에서 “자애로운 까마귀여, 자애로운 까마귀여, 새 중의 증삼이로다慈烏復慈烏 烏中之曾參”라고 까마귀를 자오慈烏라고 노래했다. 현대인은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극진한 반면에 대다수가 효도는 잃어버렸다. 자식을 효자로 만드는 유일한 비결은 그 자신이 효자가 되는 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