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고대 전제국가는 목간과 죽간 위에 성립했다?
중국사에서는 진한(秦漢) 시대를 중국 고대 통일제국이라 부르면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된 시대로 파악하고 있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군림하는 황제의 아래로 관료제, 중앙 관청, 지방행정조직, 군사방위시스템 등이 부채꼴처럼 확대되는 구조를 형성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구조보다도 구조의 운용 시스템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의 명령 전달, 문서 전달, 보고 등은 모두 문서에 의해 이루어졌고, 피라미드 각층의 행정은 문서를 통해 점검했다. 이러한 중층적 문서행정이 정치의 근간이었는데, 저자는 이것이 문서의 형태 및 재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중국 고대 전제국가는 목간과 죽간 위에 성립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 P. 258~260
- 목간과 죽간, 중국고대사 연구의 판도를 뒤집다
20세기 초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타림 분지 남쪽 가장자리의 니야 유적에서 3~4세기 중국 진나라의 목간 50매를 발견했다. 그 후 현재까지 발견된 목간과 죽간의 수는 20만 편에 달한다. 하지만 이들 출토된 간독이 사료적 가치를 갖기까지는 많은 연구자의 노력이 필요했다. 프랑스의 에두아르 샤반과 중국 고증학자 왕국유가 첫발을 내딛은 이래, 대만의 노간(勞幹)과 일본 교토 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등이 간문의 해독과 해석, 주석 작업을 벌여 막대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 극히 적은 문헌사료와 연구자의 상상력에 의존했던 중국고대사 연구는 이들 연구에 힘입어 1세기 만에 급성장할 수 있었다.
--- P.91~96
- 중국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를 해명하다
간독자료는 문헌사료가 제시하지 못한 중국고대사의 수많은 수수께끼의 열쇠를 제공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진 시황제의 문자 통일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는 승상 이사가 진나라 통일 이후 시황제의 명을 받아 문자를 전서로 통일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호북성 운몽현에서 발견된 통일 전 진나라의 죽간을 통해, 이사의 문자 통일 이전에 전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대에 유행한 것으로 알려졌던 예서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 P.144~154
- 중국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를 해명하다
간독자료는 문헌사료가 제시하지 못한 중국고대사의 수많은 수수께끼의 열쇠를 제공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진 시황제의 문자 통일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는 승상 이사가 진나라 통일 이후 시황제의 명을 받아 문자를 전서로 통일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호북성 운몽현에서 발견된 통일 전 진나라의 죽간을 통해, 이사의 문자 통일 이전에 전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대에 유행한 것으로 알려졌던 예서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 p.144~145
- 금속기와 돌은 종이 이전에 사용한 미개한 재료였나?
지금까지는 “문자를 쓰는 재료는 갑골부터 금속기와 돌을 거쳐 종이로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청동기와 석각은 단순히 종이 이전 단계에 존재한 미개한 형태의 서사 재료가 아니라, 각기 재료와 내용이 밀접하게 관련된 특수한 서사 재료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석각은 내구성과 항상성이라는 돌의 성질을 이용해서 거기에 기록된 내용을 영속적으로 전한다는 기대를 담아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을 세우는 장소도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종이가 발명된 후에도 석각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
--- p.83~84
- 간독에서 종이로의 이행
종이는 3~4세기 진대(晋代) 이후 종이는 보편화되어, 책, 편지, 그리고 부적 등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종이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목간과 죽간이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글쓰기 이외의 용도로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종이가 그 기능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시의 행정문서는 각급의 단계로 내려갈 때마다 내용이 추가되어야 했는데, 이를 그때그때 파일처럼 묶어 보관하기에는 간독이 편리했다. 또 호적처럼 오랜 시간 동안 일정한 양식으로 사용해온 서사물도 종이라는 새로운 서사 재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 p.228~231
- 종이의 발명을 둘러싼 논쟁, 그리고 채륜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종이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후한대의 채륜이다. 그런데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져 전한대에 이미 종이가 존재하고 있었음이 밝혀지자, 채륜은 종이의 ‘발명자’에서 ‘개량자’로 바뀌어 교과서에 기술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식물섬유지는 전한 시대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그것은 주로 포장지로 쓰였을 뿐 아직 글쓰기용 재료로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채륜은 종이를 글쓰기에 적합한 용도로 만든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 p.21~39
- 중앙집권체제와 문서행정
전국 말기 진나라가 문서정치를 지향한 것은 틀림없다. 다만 그것이 한층 더 충실하게 확립되는 것은 역시 기원전 221년의 통일을 기다려야 했다. 통일 이후 시행된 중앙집권국가체제, 그것은 황제의 명령이 말단까지 철저하게 관철되고, 말단에서 올라온 보고가 중앙으로 확실하게 전달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며, 명령과 상주는 문서라는 형태로 구체화된다. 시황제의 서체 통일, 공문서의 규격화, 문서 전달 방법의 정비 등은 이러한 문서정치를 전제로 한 정책이었다. 명령의 철저한 숙지를 의미하는 조서의 각석은 역시 통일제국의 성립과 중앙집권국가의 산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p.53
- 진대의 역사를 다시 쓰다
2002년 7월 16일, 일본의 주요 신문은 일제히 ‘진대(秦代)의 죽간 2만 매 출토, 병마용 이래의 대발견’이라는 표제어로 15일자 중국 신문 「문안보」 등의 기사를 소개, 보도했다. 호남성 용산현의 진한 시대 성곽 유적에서 진대의 공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2만여 매라는 것이다. “이번에 발굴된 죽간으로 진대의 역사를 새로이 다시 기술할 가능성도 있다고 중국의 전문가는 지적한다”며 각 매체는 결론짓고 있다.
--- p.90
- 목간과 죽간은 어떻게 다른가?
원칙적으로 목간과 죽간은 사용방법이 달랐다. 죽간은 편철해서 책서의 형태로 사용하는 경우의 서사 재료이고, 목간은 단독간으로 간측에 각치를 새겨넣거나, 간의 머리 부분을 원형으로 하거나 또는 구멍을 낸 상태에서 세공을 가할 때 사용되었다. 지금 거기에 문자를 쓰고 책처럼 사용하는 서사 재료를 상정한다면 그것은 죽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독간으로서 특별한 형상을 지닌 목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사 내용과 용도에 따라 재질이 한정되는 특수한 서사재료였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 p.133~134
- 간독에 담긴 문서행정의 실상
쥘부채(접었다 폈다하는)로 비유하자면, 황제의 명령을 비롯한 하행문서는 부채꼴처럼 확대되어서 침투해가고, 아래기관이 올리는 상행문서는 부채의 자루를 향하여 한데 모여서 상정된다. 그 부채의 자루에 위치하는 것이 황제이고, 부채 손잡이의 형태가 중앙집권국가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서행정은 집행명령이 각 관서를 거칠 때마다 한 매 한 매 증가하면서 확대된다. 이러한 집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서사 재료로서의 간독의 모습이었다. 간독이 추가되는 방식의 파일적 기능이 조서의 형식을 규정하고 또 전달상의 집행문언과 상신문언을 자꾸 보태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진한 시대의 문서행정은 간독의 양태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강조해두고 싶다.
--- p.175
-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
종이의 보급과 판매를 떠올릴 때 항상 인용되는 유명한 예는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라는 고사일 것이다. 서진(西晋)의 시인 좌사(左思)가 지은 「삼도부(三都賦)」는 …… 사람들의 상찬의 표적이 되면서 그 시를 쓰려는 사람들 때문에 종이 가격이 비등할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 이 고사는 「삼도부」가 얼마나 높은 인기를 누렸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로 종이가 인플레이션 상태였는지는 여기에서 실증할 길이 없고, 또 거기서 말하는 ‘지(紙)’가 오늘날의 종이(paper)인지, 「채륜전」에도 보이는 “얇은 조각의 서사 재료”라는 의미의 ‘지’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더구나 좌사가 활약했던 4세기 초에 서사 재료가 종이였다고 여기에서 단정하는 것은 상당히 지나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p.198
- 간독에서 종이로의 이행은 왜 순탄하지 않았나?
호적 등 행정 관계 서사물 역시 이른 단계에서 종이로 이행한 것은 아니었다. …… 정해진 서식과 양식이 있는 까닭에 그것들은 다른 일반적인 서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적의 종이로의 이행이 비교적 빨랐던 이유는 문자 정보 이외의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호적은 하나의 서식이었고 전국적인 통일성이라는 제약이 가해져 종이로 교체되는 데에는 기술적, 시간적인 문제를 극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외적 요인, 외압이 필요했다. 왕조의 호적이 최종적으로 종이에 쓰여지게 되었던 것은 서진이 강남으로 달아나고 그에 따라 기존 호적의 괴멸적 타격이라는 외압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257~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