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태조 나이 20세 때 꿈을 꾸었는데,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서 그 위에 올라가보았다. 위의 기록은 왕건의 입장에서 윤색된<고려사>의 한 부분이다. 왕건이 일찍부터 제왕이 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미화한 내용인 듯한데,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의 인물됨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건이 일찍부터 치밀하게 역모를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학계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궁예는 왕건이 아니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반드시 쫓겨나야 할 인물로 각인되어왔다. 그러나 위의 사료는 사실 왕건이 30세때 부터 왕이 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장기간 역모를 꾀했음을 전하고 있다.
--- p.208
여기서 궁예에게 주어진 장군이라는 칭호는 신라 정부나 그 외 나라의 관제에 속한 장군이 아니다. 신라의 신분사회에서 배제되어 하층민으로 전락해 스스로 반신라의 기치를 내건 궁예가 신라 왕실로부터 장군으로 임명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칭 장군이라는 엇갈린 기록도 있지만, 어쨌든 궁예는 신라 왕실에서가 아니라 아랫사람들의 추대를 받고 장군이 되었다. 곧 궁예가 얻은 장군이라는 칭호는 신라의 관제에 따른 장군과는 다른 성격이었고, 그의 군대 역시 신라의 군대가 아니었다. 양길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궁예의 군대는 전장에서 함께 피와 땀을 흘린 인간적 관계로 뭉친 사병적 성격이 강한 집단이었다.
--- p.97
'상시 역사를 읽을때 언제나 의문 나는 것은 선한 것은 지나치게 선하고 악한 것은 지나치게 악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저작이 비록 권선징악의 좋은 뜻에서이기는 하나 오늘날 사람들은 평지상에서 간과하여 말하기를 '선한 사람은 진실로 의당히 저래야 하지만 악한 사람은 어떻게 이 정도로 악할까' 한다. 기실 선한 것 가운데도 악이 있고 악한 것 가운데도 선이 있는 것이어서 당시 사람도 실로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거취를 잘못하여 조소를 받고 죄악을 범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성호는 선악의 포폄을 역사학의 목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선악의 면으로만 해석하려는 태도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 p.248,249
궁예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 전기에 간행된 <삼국사기>(궁예전)에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 궁예는 부인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그녀 소생의 두 아들과 함께 죽인 나쁜 왕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도 궁예는 '포악하고 방자'한 왕으로 기록되어 <삼국사기>의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이 개국된 뒤 편찬된 <고려사>는 고려의 건국과정을 서술하면서 왕건의 전사로 궁예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그때에 궁예가 반역이라는 죄명을 억지로 만들어 죽인 자가 하루에도 백여 명에 이르러 장수나 정승으로서 해를 입은 자가 십중팔구였다. 궁예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관심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겠다'라고 했다. 그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하여 죽였다. 이리하여 부녀들이 모두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한의 날로 심하였다.'
이외에 궁예에 관해 기록된 고문헌은 일부 가문의 족보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없다. 궁예와 동시대 인물인 견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궁예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일연은 궁예가 고려를 세웠다는 사실만 연표에 간단히 기록해두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과문 탓인지 그 뒤 근대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궁예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근대에 들어 단재 신채호가 <일목대왕의 철퇴>라는 미완성 소설에서 궁예를 재조명하였고, 김동인은 <진헌>이라는 소설에서 부분적으로나마 궁예를 그렸다. 또 근래에는 유현종이 궁예를 주제로 하여 소설을 쓰기도 했으며, 그밖에 왕건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에도 왕건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들러리로 궁예가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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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년 철원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려로 정한 궁예는 임금을 칭하며 관제를 신설한다. 이후 국호를 대동방국과 통일천하를 각각 뜻하는 마진과 태봉으로 잇따라 바꾼 사실을 책은 자주와 민족단합을 모색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골품제 대신 능력에 따른 관직등용제도를 신설한 것이나 독자 연호 사용과 거란과의 적극적인 통교정책 등도 궁예의 혁명가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재조명된다. 심지어 지은이는 원주-영주-명주-간성-한계령-인제-철원-서해로 이어지는 정벌로를 `궁예의 길'이라 명명하고 국토개척자라는 별호를 주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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