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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그들의 역사

발칙한 그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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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11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368쪽 | 346g | 128*188*18mm
ISBN13 9791155112632
ISBN10 115511263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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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벌렁 누워 인형을 꼭 안고 잠을 청하려니 갑자기 아까 안아주던 찬희의 가슴이 다시 생각났다. 이제 운동을 꽤 하는지 제법 탄탄해진 가슴. 찬희는 뚱뚱하고 키도 커다래서 거인 같아 보이곤 했었다.
유난히 키가 작은 지원을 매미 같아 보이게 만들었던 찬희가 살을 빼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그때가 맞는 것 같다. 첫사랑에 실패한 후.
그러고 보니 찬희 녀석도 첫사랑을 심하게 앓았다. 언제 연애를 해도 마지막일 것처럼 목숨을 걸고 하는 그녀와는 달리, 그 이후 심각하게 연애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요 몇 년 사이에는 정말 여자를 진지하게 만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찬희의 첫사랑은 정말 어이가 없는 애였다. 첫 만남 때 찬희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인사도 잘하더니, 우연히 마주친 두 번째 만남 때는 인사하는 지원을 위 아래로 훑어보곤 비웃으며 사라졌다. 그리곤 지원이 인사를 씹었다며 징징거려서 찬희와 대판 싸우고 말았다.
아무래도 여자사람친구인 자신을 의식하는 것 같아서 한동안은 찬희와 연락도 하지 않았다. 찬희도 연애하느라 바쁜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무척 배신감이 들었지만, 원래 남자와 여자 사이엔 친구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냥 그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찬희는 호되게 차이곤 엉망이 되어 나타났다. 남자애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나쁜 년이라고 말을 했다. 그간의 연애사를 들어보니 참 어이가 없을 만큼 이상한 여자긴 했다.
게다가 그땐 수능을 앞둔 고 3이었다. 도대체가 저 녀석이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엉망이 된 녀석을 추슬러주기 위해서 친구들 모두가 매달렸었다.
술에 취한 찬희를 처음으로 본 것도 그때였다. 어디서들 구했는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술을 먹고 나타난 남자애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서 찬희를 눕혔다. 그때 찬희녀석은 울었던가.
그렇게 수능을 망친 찬희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졸업 후 바로 군대까지 가야했다. 그리고 2년 후 돌아온 찬희는 그때의 뚱땡이 찬희가 아니었다.
확실히 지금의 찬희의 모습이 더 보기는 좋다. 비밀이지만, 진짜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한때 지원도 찬희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적이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반평생이 넘도록 친구로 지내온 녀석을 좋아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인데다가 그 말을 들은 찬희의 표정도 상상조차 가지 않아서 혼자 속앓이를 하고 지나갔다.
시간이 약이긴 약인지, 이젠 찬희를 보아도, 업혀도,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렇지도.
엄마는 늘 말했다. 결혼은 찬희 같은 애랑 하는 거라고. 솔직히 찬희는 노말 하지 못한 성격을 가진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감싸주고 제대로 속속들이 알아 파탄을 맞거나 하지 않을 사람은 어쩌면 정말 이 세상에 김찬희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낯 뜨거운 상황을 어찌 만든단 말인가.
하긴 서른의 약속, 우리는 서른을 약속했다. 그리고 서른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깨어져버린 사랑에 허덕이는 지원과 묵묵히 들어주는 찬희. 언제나 똑같은 둘.
아무리 남자가 궁하다고 해도 그렇지, 자그마치 20년 지기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 이번 실연으로 크게 상처를 받았나보다. 잠이나 자야지, 정말 이러다가 새벽 두시, ‘자니……?’ 하고 문자를 남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눈은 말똥말똥해졌다. 그리고 한번 가닿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굳이 찬희가 아니라도 모임에는 집안 좋고, 뭐 인물도 그럭저럭 같이 밥은 먹어줄 수 있는 정도가 되고, 지 앞가림을 잘하는 애가 다섯이나 되었다. 하지만 찬희 만큼 친하게 지내는 애도 없고 찬희 만큼 잘생긴 애도 없긴 했다.
언제였더라, 언젠가 학교로 차를 몰고 데리러온 찬희 때문에 친구들이 난리를 친 적이 있었다. 살이 빠지고 나니 제법 코도 높고 눈도 컸던 찬희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유명한 킹카가 되었다. 웬일인지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남았다며 데리러온 찬희를 소개시켜달라고 얼마나 애들이 보채댔는지, 그때부터 지원도 찬희를 새삼 다르게 보기 시작했었다.
20년의 역사를 모두 돌이키기엔 하룻밤은 너무 짧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지원은 알람소리에 몸을 일으키고 절망하고 말았다. 지각이다!

“오래 기다렸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찬희가 고개를 돌렸다. 웬일인지 화를 내지 않는다. 하긴 오늘은 평소보다 엄청 일찍 도착해서 10분도 늦지 않았다.
“앉아.”
“무슨 할 얘긴데 그래?”
평소와 달리 뜸을 들이고 있는 게 영 찬희답지 않았다. 지난 20년, 서로에게 무엇인가 뜸을 들여가면서 해야 할 말이 있었던가. 아니다. 그냥 할 말이 있으면 하고, 그러다가 싸우기도 했고, 다시 안 볼 것처럼 욕설을 내뱉기도 했지만 이렇게 뜸을 들여가면서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었다.
묵묵히 평소처럼 주문을 하고 앉은 찬희가 정말 낯설었다. 늘 그렇듯, 지원이 좋아하는 메뉴가 테이블 가득 차려지고, 몇 번이나 잔이 오갔는지 모르겠는데도 찬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언젠가 딱 한번 이랬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를 떠올리니 또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너 뭐 크게 사고 쳤냐?”
농담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진지한 표정의 찬희가 창밖으로 던지고 있던 시선을 돌려 지원을 바라봤다. 여느 때와 다른 진지한 표정에 진지한 눈빛이라 잠시 무척 큰 일인가보다 지레짐작하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야, 이지원.”
“왜? 말을 해봐. 무슨 일인데? 내가 뭐 도와줄 수 있을만한 문제야?”
“도와준다라…….”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은 찬희가 굳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지원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쟤가 왜 저러지? 정말 큰 사달이라도 난 것이 틀림없다.
“그래. 너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긴 하지.”
“그래서 그게 뭔데?”
“이지원.”
“응, 말해.”
“지원아.”
“말하라고, 이 자식아.”
“결혼하자.”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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