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치르듯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간신히, 간신히 집에 돌아왔습니다. 해는 진작 떨어졌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진동합니다. 따뜻한 밥과 보글보글 찌개 생각이 간절하지만, 피자 주문할 기운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부엌에서 뭔가 구수한 냄새가 나고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리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혼미한 상태라 반갑게 뛰어갈 수는 없지만 뭔 소린지 모를 말이 튀어나옵니다.
“저녁 나 고파, 얼른 배 줘.”
그리고 천천히 정신을 차립니다. 냄새가 코를 간질이고 입에서 군침이 돌고 눈에서는 만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섬광이 마구 번뜩입니다. 갑자기 생기가 돌며 신발을 힘껏 벗어던집니다. 땀에 전 양말도 벗고 부엌으로 돌진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정성스레 차려 놓은 식탁 앞으로!”
_#001 긴 하루를 마치고 집에 왔더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17쪽)
“차에 탔던 사람들이 주유소 화장실에 간 사이 차 문을 잠급니다. 그러고는 전속력으로 차도로 돌진해, 그냥 그대로 가 버립니다. 피해자들은 차도 가장자리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빨며 서성댑니다. 차가 코너를 돌아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천만에요. 차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중략)
그런 장난을 칠 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절대 권하고 싶지 않은 단계입니다. 관계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으니까요. 영원히! 완벽하게!”
_#054 차 밖에 일행을 세워 두고 가 버리는 척하기(114쪽)
“공연장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리며 음료를 마시고, 티셔츠를 구입하고, 자리를 찾아 앉고, 무대 가까이로 다가가서 분위기를 살피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밴드가 오늘 어떤 노래를 들려줄지 추측하며 수다를 떱니다. 열기가 계속 뜨거워지죠. 그러다 어느 순간 배경음악이 잦아들고 모든 조명이 꺼집니다. 갑자기 사방이 암흑 속에 잠깁니다. 관중의 열기와 기대감이 하늘 높이 치솟습니다. 모두들 일어나 두 팔을 흔들며 소리칩니다. 밴드가 무대로 등장하는 순간, 환호성이 터집니다.”
_#062 조명이 꺼지고 밴드가 등장하려는 찰나(128쪽)
“책 냄새를 맡으면, 대학 도서관에서 생물학 책들을 잔뜩 쌓아 놓고 밤늦도록 시험공부를 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여름휴가 때 해변에 비치타월을 깔고 엎드렸던 생각도 나고요. 또 어린 시절 거실에 놓여 있던 묵직한 백과사전 세트도 생각납니다. 그 백과사전을 보며 사마귀나 나이지리아, 1972년 하계올림픽 등에 관한 숙제를 했죠. 책 냄새를 맡으면, 읽는 법을 배우고 세상을 탐구하는 법을 배우던 때가 생각납니다.”
_#073 행복한 책 냄새(146~147쪽)
“작년에 입던 스키 재킷에서 10달러짜리 지폐가 나오거나, 세탁기 안쪽에 떨어진 동전을 발견하거나, 술 냄새가 풍기는 블레이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지폐가 나오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공짜 점심에 비길 만하죠. 어차피 내 돈이었던 건데 뜻밖의 순간에 찾았다고 해서 뭐가 그리 신나냐고요? 네, 그 돈으로 빚을 갚을 수도 없고 명품 가방을 살 수도 없지만, 귀여운 비니나 톱니바퀴 모양의 토블론 초콜릿처럼 평소 사고는 싶었는데 주저하던 걸 살 수는 있습니다. 진짜 그냥 쓰라고 생긴 돈이니까요.”
_#082 외투 주머니에서 생각지도 못한 돈이 나왔을 때(161쪽)
“남자용 소파란, 여성복 매장의 탈의실 근처에 놓인 소파를 말합니다. 사실 남자용 소파란 게 뭐 따로 있나요? 대개는 남자들이 앉으니까 남자용 소파로 불리는 거죠. 거기서 남자들은 대부분 문자를 주고받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멍하니 앞을 응시합니다. 입을 헤벌리고 눈은 반쯤 풀려 있죠. 손에는 다른 매장에서 산 물건들이 쇼핑백 가득 들려 있고요. (중략)
남자 입장에서 이 소파는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달래 줄 위로의 장소입니다. 체력 좋은 ‘여친’의 지칠 줄 모르는 쇼핑 행진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또한 주변에 앉은 다른 남자들과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일곱 벌의 스웨터를 갈아입고 그냥 나왔다는 이야기, 바짓단을 줄이기 위해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는 이야기 등을 속삭이며 불만을 토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남자용 소파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습니다.”
_##131 남자용 소파(246쪽)
“정말 서기 싫은 끔찍한 줄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참고 서 있다가 볼일을 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긴 줄에 질려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기 전에 운 좋게 앞줄에 서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점심시간에 샌드위치 가게에 가면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줄만 서야 합니다. 대신 조금만 서둘러 가면 당신 뒤로 꼬불꼬불 줄이 길게 늘어서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구청에 민원서류를 접수하려는데 마침 휴식시간을 끝내고 들어온 직원이 새로운 카운터를 열면 정말 반갑습니다. 뒤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면서도 당신의 행운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듭니다. 언젠가는 당신도 저 뒤에 설 거라는 사실을 아니까요.”
_#136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앞줄에 서기(255쪽)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집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집안 꼴은 엉망이고, 저녁 식사도 늦어지고, 오늘따라 전화도 한 통 오지 않는군요.
네, 몹시 화가 난 당신은 TV 앞에 앉아 씩씩거리고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흐느낍니다. 하지만 애들이 가만히 방문을 열고 나와 옷소매를 잡으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순간, 뚜껑이 열릴 것처럼 씩씩대던 당신도 언제 그랬냐는 듯 누그러집니다. 소리 없이 웃으려 애쓰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당신은 공연히 화를 냈구나 싶어 후회합니다. 그러고는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꼭 껴안아 줍니다.”
_#161 말 없는 화해(297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