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인간 역사를 전해준 ‘지정된’ 이야기꾼들인 남성은 당연히 요부 설화를 간수해온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 설화가 이야기되던 각 시대에 따라서, 요부들은 매우 사악하고 지독한 여성이 될 수도 있고, 또는 남성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신들의 주된 임무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그렇지만 그들 남성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은 전혀 되지 않는) 매혹적인 기분전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요부들이 정확히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치는가 하는 문제는, 이야기꾼들이 남성의 우월성에 얼마나 자신감을 갖고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 p.17(머리말 중에서)
초기의 율법박사나 기독교 교부들이 주로 한 이야기가 타락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여자를 멀리하라고 남자들을 계고하는 것이었다면,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설화는 주로 남자가 감미롭고도 위험한 섹스를 마음껏 즐기고 난 후 어떻게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인들도 자신들이 위험한 땅을 밟고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이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판도라였다.
--- p.50
사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식량 지원을 필요로 했으며, 이집트 여왕에게 넘겨준 그 지역에서 자라난 수목을 베어 함선을 건조하려면 이집트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성적인 매력을 차마 거부할 수가 없어서 로마의 영토를 그녀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로마 사람들을 선동해댔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기민한 정치적 거래를 음탕하게 휘둘러댄 허리의 권력으로 격하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안토니우스가 누구를 위해서 그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려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도록 만들었다.
--- p.87~88
그녀는 그의 마음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그가 한번쯤 경험해보기를 그저 꿈꿔오기만 했을 뿐이던 바로 그 흥분된 감정을 일깨울 수 있었다. 그녀의 온기가 그를 관통했을 때, 그녀의 포옹이야말로 그가 경험해보고 싶었던 유일한 우주였다. 그런 것이 바로 요부의 능력이고, 또한 그 점은 지금도 늘 변함이 없다.
--- p.119
18세기에 여성들이 좀 더 많은 자율권을 요구하고 나서기 시작하자, 남자들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지나치게 과도한 정신활동은 여성들의 머리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타이르면서 집에 편안히 머물러 있는 편이 더 낫다고 권장하였다. 빅토리아시대의 남자들은 여성의 가치란 힘든 일을 맡거나 지적인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여성의 미덕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상적인 여인이란 남편과 함께 가족의 제반 업무를 애써 꾸려나가는 동반자의 역할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가정의 성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은 남자가 쉴 곳을 찾아 은둔해 들어갈 수 있게끔 그에게 평온한 안식처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숙한 백합과도 같은 여인이 성관계를 감수하는 것은 그녀가 성관계를 즐기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고상한 응접실 안에 갇히게 된 여성들은 눈에 띄게 창백해져갔고, 점차로 ‘우울증’의 습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편 남자들은 금전적인 편의주의에 물든 흉악한 세계에서 그야말로 돈을 벌기 위한 비즈니스의 삶에 빠져 있었고,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매춘부들을 찾아갔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의 폭은 더욱 더 넓어져버렸다.
--- p.162~163
치명적인 여인과 어수룩한 여인 사이를 오가는 순환은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시기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음탕한 팜므 파탈이 등장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그녀들 또한 1950년대에 진 할로우의 뒤를 이어 혜성처럼 등장하는 마릴린 먼로 같은 여인이 구현하게 될 사랑스러운 섹스 키튼(sex kitten)들에 의해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 p.194
먼로는 남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것 말고는 다른 꿍꿍이가 없음을 그들에게 약속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담긴 언외(言外)의 의미란, 그녀 자신도 물론 섹스를 즐기지만 특히 남자들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그것을 베풀어줄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자신이 그녀를 원한다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전적으로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녀의 존재 이유이다. 그녀는 남자들이 세상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든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런 문제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필요로 하는 전부는 오로지 남자들의 애정을 받는 일뿐이다.
--- p.226~227
이제 여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만든 각자의 고유한 일정표에 따라서 자신들의 특징을 강조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명암을 깊게 만들기도 하는 그런 자유로운 존재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성취한 자유로움으로 무장한 여성들은 자신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들이 직접 공상해낸 자신들만의 요부의 환상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 p.285~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