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첫 페이지는 그리 난해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눈을 뜨면 보이는 건 다양한 정령이 조각된 천장, 그리고 시작되는 또 다른 하루. 씻고 간단하게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으러 간다. 간간이 중요한 파티는 가서 얼굴도 비춰 주고, 아빠랑 단둘이 산책도 하고, 가끔은 다투기도 하는 그런 일상. 막상 그렇게 지나간 하루하루는 무척 알차서 무언가 되게 길고 길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돌아보니 어느새 벌써 나는 열여덟의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비록 키는 156밖에 되지 않지만. 흡, 괜찮아. 나는 울지 않아. 언젠가 어른이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다시 어른이 되는 건 아주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라고. 진짜 인생은 참 빨라. 전생도 그러했지만 이번 역시 나는 어른이 될 마음의 준비조차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었다. 아직 내가 내 인생을 제대로 책임질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르겠는데, 덜컥 열일곱 성인식부터 치르고 나니 쏟아지는 걱정에 숨이 턱 막혔다. 내가 과연 잘해 나갈 수 있을까? 정말 내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전에도 느꼈던 불안이지만 그때도 그러했듯 이 질문들은 마냥 앉아서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동안 너무 어린애로 있었나 봐.” 정신이 어린애가 아니라고 해도 내 몸은 어린아이고, 다른 사람이 날 대하는 태도도 영락없이 어린애 대하는 투라, 그래, 이렇게 된 거 실컷 응석이나 부리자 했던 게 어느새 몸에 그대로 배어 버린 모양이다. 하긴 거기에 난 둘도 없는 귀여운 아이였으니 고집을 부리거나 응석을 부려도 모두가 그대로 받아 주고 귀여워해 줘서 더 문제였다. 혼자 안 되는 게 있으면 바로 누군가에게 손을 뻗으면 모든지 손안에 들어오는 환경에서 아이가 스스로 버릇없이 자라지 않는 게 정말 얼마나 힘든 건지 나는 공주로 자라면서 깊이 깨달았다. 이래서 왕족들 성격이 하나같이 거지 같구나. 알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