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갈로르 기차역에 내려서고 보니, 나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땅에 아이들과 함께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묵을 숙소도 정해지지 않았고, 마중 나올 사람도 없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고는 에이전트의 친구뿐이었는데, 그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호텔에 짐을 푼 뒤 집을 구해서 정착하기까지는 열흘이 걸렸다. 아이들은 시리얼과 우유로 허기를 달래며 일주일 이상 호텔에서 통학해야 했다. 나는 3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매일 달려가 부동산업자를 만나야 했다. 그러나 부동산 업자가 보여주는 집은 하루에 한두 채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집이 맘에 들어 계약하려고 하면, 집주인이 마음을 바꿔 외국인에게는 세를 놓지 않겠다거나, 채식주의자에게만 세를 놓는다는 이유로 거절을 했다.(‘도 닦는 게 뭐 별건가’ 중에서)
친구들 몇이 집에 놀러 와서 자장면을 만들어준 적이 있다. 인도인은 검은 색깔의 음식을 가뜩이나 꺼려하는데, 한 친구가 숟가락으로 자장면을 뒤적이다 말고 돼지고기를 가리키며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돼지고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숟가락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식탁에서 물러앉았다. 나는 깜짝 놀라 “왜 그러냐고?”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자신이 무슬림이라고 말했다.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지저분한 동물이라며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무슬림은 돼지고기가 올라와 있는 식탁에 앉는 것조차 꺼린다. 그 날 그 친구는 결국 커피만 마시고 돌아갔다.(‘인도에는 카레가 많다’ 중에서)
뱅골만 해안 길을 계속 따라가는 타밀나두 여행 길의 또 다른 재미는 인상 좋고 인심 많은 남인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그 지역을 누볐는데, 버스 안에서 만난 그 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시골 장날처럼 붐비는 버스 안에서는 자신들의 자리를 좁혀 우리에게 앉을 자리를 내주었고, 자신들이 먹던 인도 과자나 사탕수수 따위를 선뜻 권하기도 했다... 인도는 지저분해서 싫다던 지민이와 영주는 그 곳을 여행하면서 비로소 인도의 참모습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길에서 만나는 인도인은 지저분하다며 말조차 섞지 않았던 지민이와 영주는 버스 안에서 만난 인도 아이들이 때 낀 손으로 내민 과자도 덥석 받아 먹었다.(‘또 하나의 지구촌, 오르빌’ 중에서)
아잔타 석굴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플래시를 터뜨릴 수 없다. 플래시가 가뜩이나 세월 앞에 훼손되는 그림을 더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 규칙을 깨뜨리고 말았다. 디지털 카메라를 가져갔는데, 조작 실수로 플래시를 터뜨리고 만 것이다. 그 순간 동굴 안을 지키던 안내원이 험상궂은 얼굴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벌금으로 3천 루피를 내던지 감옥에 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숨막히는 석굴 미술의 꽃’ 중에서)
한참 맥주를 마시는데 검표원이 나타나서는 기차 안에서는 금주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거 또 벌금을 내야 하는 건가 싶어서 겁이 덜컥 났다. 하지만 취한 김에 용기를 내서 사정을 해보았다. “그래요? 전혀 몰랐어요. 한번만 봐주세요. 사온 것만 마시고 다음부터는 안 마실게요.” 그랬더니 그 검표원은 실실 웃으면서 “내가 당신을 언제 봤다고 봐줍니까?”라고 반문하는 것이 아닌가.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옳지, 개기면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맥주병을 그 검표원 앞으로 쑤욱 들이밀며 “그럼 당신도 이거 한 병 마셔요. 공범이 되면 우리를 봐줄 수 있겠네요”라고 말했다.(‘남인도의 긍지, 마이소르 성’ 중에서)
마침내 인도 땅을 다시 밟았다. 인도 출입국 관리소에 가서 다시 입국 신고를 마쳤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네팔 돈이 남아 있었다. 네팔을 빠져나오기 전에 뱅갈로르 친구들에게 줄 한국 담배 ‘솔’을 살 작정이었는데, 그것도 깜빡 잊고 말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인도에서는 한국 담배를 구경할 수 없었는데, 네팔에서는 어느 가게에서나 한국 담배 솔을 싼 값에 팔았다. 잠시 망설이던 끝에 나는 국경을 지키는 인도 경찰을 꼬셔보기로 했다. “지금 입국 수속을 마치기는 했는데, 네팔에 다시 건너가야 할 상황입니다. 그 곳에서 꼭 사야 할 물건이 있는데, 잊었어요. 다시 건너갔다 올 수 있을까요?” 그는 내 얼굴과 지민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다녀오라고 허락했다.(‘5분만에 네팔-인도 국경을 두 번 넘다’ 중에서)
인도 대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들의 언어 능력이었다. 기본 5개 이상의 언어를 못하는 학생이 드물었다. 영어와 힌디어, 자기가 사는 지역의 언어는 기본이었고, 거기에 타 지역 언어 몇 개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인도 친구들은 나랑 처음 말을 틀 때마다 “몇 개 언어를 할 줄 아니?”라고 묻곤 했다. 그 때마다 한국어와 영어밖에 모른다고 하면 ‘겨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다.(‘인도말을 통역하다?’ 중에서)
지민이는 1년 동안 인도에서 살았지만, 사실 인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저분하고 불편한 게 많다는 이유였다. 그런데도 지민이가 인도로 다시 간 까닭은 순전히 학교 때문이다...
한국에서 알파벳도 모르고 간 지민이가 처음부터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 한 달 동안에는 학교에 가서도 입을 열지 않았고, 학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나이가 어려서인지 친구들과 놀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익혔고,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서 특별 영어 수업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침 8시반부터 오후 3~4시까지 수업이 있었는데도, 지민이는 한 번도 학교 생활이 지겹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말만 되면 ‘학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지민이가 다시 인도로 간 까닭은’ 중에서)
우리 집 일을 도와주었던 락시미는 아이가 넷이었는데, 큰 딸이 열세 살이 되자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공사판 막노동을 하는 남편과 자신이 허드렛일을 하고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여섯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벅차다고 했다. 영주와 동갑내기였던 락시미의 딸은 학교를 그만두자마자 엄마와 똑같은 일을 시작했다. 그 아이에게는 더 공부해서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남의 집 일을 하며 동생들을 돌보다 비슷한 처지의 남자에게로 시집 가서 제 엄마의 인생을 답습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래는 꿈 꾸는 자의 것’이란 말을 너무도 쉽게 하지만, 꿈 꿀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수업료 5백원짜리 학교, 천만원짜리 학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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