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혁의 시는 물속 같다. 공기 속 같다. 들리지 않는 소리 같다. 만져지지 않는 감촉 같다. 이런 성동혁의 언어를 액체화된 감각이라고 부르고 싶기도 하다. 최저음부를 잡아내는 감각. 얼핏 보면 고요하고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시를 읽어 나가다 보면 느껴지는 기이한 슬픔에서, 그것이 들끓어 오르는 격렬함을 가라앉힌 손만이 쓸 수 있는 언어임을 알게 된다. 간명하고 투명한 언어에서 관념이 아닌 체험의 지점이 육화되었다는 것, 오랜 시간 언어에 몰두한 흔적을 알 수 있다.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는 고통일 수 있지만 시인에게는 축복일 수 있다. 시인은 고통을 제 몸으로 살아 내고 가라앉혀 언어를 ‘보는’ 자이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아니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을 수 없는 것이 들리는 몸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이원(시인)// 2011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심사평에서
병원에서 병을 고쳐 나가는 사람이 있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그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병원의 엘리베이터와 복도와 방들을 허깨비처럼 평생 떠도는 사람 말이다. 병과 병원의 세계에 침잠하고 있는 성동혁의 시는 이 세 번째 사람에게서 흘러내린 그림자 같은 느낌이다. 더 이상의 생경한 고통도 없고 방문해 줄 새로운 손님도 놀라움도 없는 그런 세계는, 추락하지도 궤도를 이탈하지도 못하고 똑같은 길을 수없이 오가는 폐기된 인공위성의 몸짓으로 단어들과 행들을 움직여 나간다. 올해 신인상은 병실의 난간에서 천천히 건조해져 가는 수건 같은 이 고통의 세계를 선택했다.
서동욱(시인?문학평론가)// 2011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심사평에서
성동혁의 작품들은 그냥 ‘맑은’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비극 속에서 ‘맑아진’ 언어를 획득하고 있다. 그의 시가 보여 주는 맑은 슬픔은 재생(再生)의 약효를 가진 액체처럼 슬픔의 얼룩을 지운다. 얼룩을 환한 부분으로 밝히는 그의 언어는 얼룩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얼룩을 가장 천진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생겨난다. 그의 시의 서랍을 열면 서랍이 길 것이란 예감을 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실존적 슬픔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 끌고 가려는 시적 의지와 새로운 시작을 매번 해낼 수 있는 어린이의 내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조금 망설이고 있는 듯도 하지만, ‘투명한 서정’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시적 힘과 매혹이 그의 시에서 이미 발아하기 시작했다고 나는 느꼈다.
김행숙(시인)// 2011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심사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