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근세는 종교적인 권위와 세력을 억압한 병영국가였다. 그 강고했던 ‘무위武威’와 ‘어위광御威光’ 국가 속에서 사무라이武士·햐쿠쇼百姓·죠닌町人은 각각의 ‘야쿠役’를 다하는 것이 의무였고, 그것을 통해 안정된 종적인 계층질서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겐로쿠기 이후의 상품경제·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안정되었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대대로 내려왔던 가문에 관계없이 다만 금·은이 죠닌의 가계도가 되는 것이다”라고 잘라 말해, 돈이 집안과 신분보다도 중요하다는 관념이 생기고, 예로부터의 인간 관계는 상실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사무라이·햐쿠쇼·죠닌의 신분을 초월한 ‘일본인’이라는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지향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갈래의 길이 나뉘어졌다. 그것은 “경쟁이 도입되어 승자와 패자가 생기는” 사회의 경제화 속에서 승자의 논리와 패자의 그것이다. 전자가 개인의 ‘독립이라는 새로운 감정’을 기반으로 한 난학이고, 후자가 패자·약자의 르상티망에 근거한 불안으로부터 ‘새로운 복종과 강제적 비합리적 활동’을 재촉하는 국학이었다.
다케고시 요사부로가 막부 말[幕末] 페리의 내항으로 ‘일본국’이라는 의식이 용솟음쳤다고 논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일본인’ 의식이란 주로 국학에 의해 표현된 귀속의식이었을 것이다. 막말 지사志士로 불린 하급 사무라이들과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의 문인들은 ‘마술적 조수助手’인 천황에 대해 격정적으로 복종, 즉 충성함으로써 ‘번’과 ‘사농공상’ 신분이라는 할거의식을 초극超克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학적인 ‘일본인’ 의식이 전면에 나왔던 근본 이유는 병영국가라는 큰 틀이 결국 근세말까지 붕괴되지 않았던 사실에 잠복하고 있다. 막부幕府 말에 일본에 왔던 영국 외교관 얼콕Rutherford Alcock(1809~1897)이 “정부는 봉건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행정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 때까지 기획된 것 중에서 가장 교묘한 간첩조직이다”([대군의 도시The Capital of the Tycoon](1863), 야마구치 고사쿠山口光朔 역, 岩波文庫)고 감탄했던 감시제도는, 막부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살아 있었다. 사회경제사적으로 볼 때 군대와 같은 이런 종적 질서가 최후까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은, 겐로쿠기에 시작된 상품경제·화폐경제의 미숙함과 자본주의화가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는 반증임은 말할 것도 없다. 즉 ‘경쟁이 도입되어 승자와 패자가 생기는’ 사회의 단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발달하지 않음으로써 경쟁이 병영국가의 제약을 받아 오히려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현실로 진행되는 빈부격차에 대한 분노는 안으로 공박해 들어가고, 돈이 돈을 낳는 사회 동향에 대한 르상티망ressentiment에 근거한 국학자의 ‘일본인’ 의식이 고양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배자들이 국학자들의 이러한 ‘일본인’ 의식을 교묘히 이용함으로써, 요동치는 병영국가를 재건하고자 커다란 정치운동 즉 손노죠이尊王攘夷 운동을 선동했던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이, 막말 지사들의 성전聖典이었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齋(1781~1863)의 [신론新論]에서 제창되었던 후기 미토학水戶學의 손노죠이론尊王攘夷論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병영국가의 ‘무위’의 지배가 내우외환이라는 국내적·대외적인 위기 속에서 붕괴될 무렵에, 막부측 지식인이 천황을 종적인 계층 질서의 정점에 올리고, 다이묘의 산킨코다이參勤交代와 같은 시위처럼, 가령 천황의 즉위의례=다이죠사이大嘗祭를 통해 사람들의 복종심을 모아 병영국가를 재편성하려 했던 사상이었다. 환언하면, 행위 규율(=律儀)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마술적 조수’로서의 천황 권위를 교묘히 이용하면서 국가의 내적 통합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 방책은 분명히 유효했다. 병영국가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면서도 뭔가 조리에 맞지 않는다는 감정 때문에 힘들어 하는 ‘행위 규율’적인 사람들의 르상티망을, 돈에 오염된 이적=서양 열강에의 증오심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대규모의 공격적 격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대일본제국 헌법]과 [교육칙어교육칙어敎育勅語] 이 둘을 지주로 하는 ‘근대’ 일본의 메이지 국가는, 사상사적 계보에서 볼 때 후기 미토학 사상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세 병영국가의 유산을 이어 받았던 메이지 국가는 군대와 교육 그리고 여러 가지 의례를 통해, 국학에서 말하는 ‘마술적 조수’인 천황에의 복종심, ‘천황의 대어심大御心을 마음’으로 삼는 절대의존적인 생활방식을 위에서부터 ‘신민臣民’들에게 주입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난학자들이 추구했던, 자기의 재능과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면서 ‘일본국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던 사고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가 [학문의 권장學問のす?め]에서 “일신 독립하여 일국이 독립한다”고 한 테제로 정식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 초기의 계몽주의 단체인 메이로쿠샤明六社 동인들은 독립자존심 강한 개인을 배출함과 동시에 독립한 개인들이 짊어지는 국민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은 정통 난학 계보에 속한 인물들로, 자기의 능력과 재능에 강한 자신감을 가졌었다. 그들은 국학자류의 ‘천황의 어심을 마음’으로 여기는, 천황의 명령이라면 선악사정善惡邪正을 논하지 않고 복종하는 마조히즘적 정신 상태를 ‘마음의 노예’라 비난하고(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국체신론國體新論]), 독립 자존 정신을 계몽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내 마음의 바깥에 믿을 힘이 될 것은 없다”고 하는 주자학의 주체성·자율성이 양학자들의 생각과 모순되지 않음을 덧붙여 두고자 한다. 그 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메이지 초기,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된 주자학자 나카무라 게이우中村敬宇(1832~1891)의 [서국입지론西國立志論]은 영국의 사무엘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자조론Self-Help](1859)을 번역한 것으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는 말은, 사람들이 ‘자강自强 자면自勉하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나카무라 마사나오전中村正直傳])으로 평가되는 주자학자 게이우의 가치관과 딱 들어맞는 것이다. 좀 비꼬자면 주자학의 자율성·주체성은 메이지가 되어서 겨우 본래의 모습을 온전히 발휘할 찬스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너무 늦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서양 사상의 도도한 유입 앞에서는 군신관계를 절대적인 ‘천리天理’로 근거지우는 사고는 이미 진부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일본에는 정부는 있어도 국민(네이션)은 없다”([문명론의 개략] 권5)라고 비판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 정신으로서 독립자존 정신의 중요성을 반복하여 주장하고 사람들의 비굴한 노예근성을 혁신하고자 했다.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장]에서, 인간의 악덕 속에서 가장 버려야 할 것이 ‘원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망’은 진취적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상태를 보고 불만을 품고 타인을 불행에 빠트림으로써 만족하는 비열한 감정으로 독립자존 정신과 반대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국학의, 그리고 메이지 국가에 의해 고무된 ‘신민臣民’에 주입된 내셔널 아이덴티티는 바로 이 ‘원망’에 기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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