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키스의 타락
키스는 숭고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우애로운 ‘관계’를, 서로 개별적인 단독자가 엄연히 따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하나로 접속되는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세계에 내던져진 개체는 오직 타자와 교감하는 키스의 순간을 통해서만 단독자들의 연대가 가능함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연대를 공통감각의 발현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너’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존재일 따름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키스하는 순간 다른 존재로 변이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문제는 키스가 타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로간의 우애로운 마주침의 행위도 교환가치로 환산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간에 차로 10분 이내로 키스를 사고 팔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매우 외진 곳에 있거나 혹은 매우 치안이 잘 관리되는 곳에 있는 셈이다. 예컨대 키스는 다음과 같이 타락했다.
아저씨는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받쳐 들더니 입술을 덥석 물었다. 술 냄새가 약간 났다. 아빠에게서 나는 술 냄새도 지겨운데 ……. 눈을 꼭 감았다. 입술이 떨어져 나갈 만큼 빨아대던 아저씨는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입안이 아저씨의 혓바닥으로 가득 찼다. 얼마동안 입술을 이렇게 대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짜증도 나고 슬슬 겁도 났다. 그만 하자고 가슴팍을 밀었지만 아저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속으로 뭐라고 웅얼거리는 것이 이미 돈을 다 주었다는 말인 것 같았다. 입속에 가득 넣었던 혀를 뺀 아저씨는 침이 잔뜩 묻은 혓바닥을 목에 대더니 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버둥거리며 숨만 헉헉거렸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키스하러 가자? 중에서)
“돈”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키스는 위와 같이 진행된다. 여기서 존재의 변이 따위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짜증”과 “겁”일 따름이다. 비단 위와 같은 장면 뿐만은 아니다. 교환가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실에서, 개체의 역능과 공동체의 덕을 고양시키기 위한 모든 행위는 더 이상 본래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만인은 만인에 대한 투쟁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키스는 시장 독재에 의해 하나의 ‘상품’으로 타락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근대 소설이 타락한 세계에 대한 증언의 형식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소설은 키스의 타락에 맞서 싸우며 교환가치의 독재를 종식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소설의 몫이 아니라 정치의 몫이다. 하지만 소설은 이토록 비루한 키스의 타락에 대해 증언할 수 있다. 그것도 추상적인 개념어의 형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술어를 통해 진술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키스의 타락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내가 단독자이며 그러하기에 당신과 접속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권영임의 소설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2. 존재하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
기실 만약 ‘당신’이 투명한 형식으로 존재한다면 그 접속은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타자는 그 존재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는 세련된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기호들의 이면에 놓인 존재들은 세계의 밖으로 추방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언어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복원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러한 존재들. 양아버지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거나(?거미의 집?), 남편에 의해 폭행당하거나(?도쿄호텔?), 성을 매개로 겨우 먹을 것을 획득할 수 있는(?벽?) 하층 여성들. 혹은 사설 경마도박장에서 청춘을 버티는 청년실업자나(?스탠바이?), 자본의 구조조정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가장(?침묵?)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담론장에 진입하기 위한 상징자본을 지니지 못했기에 그 존재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로 치부된다. 간혹 출몰하더라도 지배 담론이 자신의 정당성을 승인받기 위한 대리보충물의 형식으로 순치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타자를 인식하고자 한다면, 그때 비로소 소설이 의미를 지닌다.
없지만 있는 곳, 있어야만 하는 곳.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도쿄호텔에 가면 허름하지만 정호랑 같이 살 수 있는 방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택시에 올라탄다.
도쿄호텔로 가주세요. (?도쿄호텔? 중에서)
타자는 지금은 철거되어 존재하지 않는 “도쿄호텔”에 존재한다. 이곳은 “없지만 있는 곳”이며 “있어야만 하는 곳”이다. 담론장에 그곳은 존재하지 않지만, 담론장의 ‘이면’에 엄연히 “도쿄호텔”은 존재한다. 그 이면의 잉여를 기록하는 것이 소설의 몫이다. 담론장에 그곳은 이제 “국제빌딩”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만, 소설에는 엄연히 “도쿄호텔”로 기록된다. 이를 통해 소설은 “국제빌딩”의 이면에 존재하는 타자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도쿄호텔”에서 현현하는 타자는 담론장에서 재현되는 것과 같은 순치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삶을 기투하는 존재이다.
S는 수컷을 보호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탈피가 끝나 몸을 말리고 있는 수컷에게 스트레스를 주어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목적은 수컷을 그냥 죽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지켜볼 것이다. 암컷이 어떻게 먹어치우는 가를. 나는 비로소 수컷을 보호하는 방법이 결국 수컷을 죽이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암컷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다. 핀셋을 손에 들고 있지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교미가 끝난 암컷이 수컷에 독침을 놓아 액체로 만들어 서서히 먹어치운다. 암컷의 뱃속으로 사라지는 수컷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거미의 집? 중)
타자는 온순한 거미가 아니라 “교미가 끝”나자마자 “수컷에 독침을 놓아 액체로 만들어 서서히 먹어치”우는 존재이며, 이를 “지켜볼 것”을 각오하는 존재이다. 이를 위해 타자는 기꺼이 “먹이”를 먹는 행위를 중지한다. 바로 자신을 억압해온 것들을 “먹이”로 삼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먹이”로 삼기 위해 버티는 존재. 억압된 타자는 이렇게 성난 얼굴로 귀환한다.
권영임의 소설은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성난 얼굴을 기록한다. 그들은 “국제빌딩”이 아닌 “도쿄호텔”에서 출몰하며, “수컷을 보호하는 방법”을 통해 역으로 “수컷을 죽”이는 존재이다. 그렇게 이미, 억압된 것들의 귀환은 시작되고 있다.
3. 먹는 입, 말하는 입, 키스하는 입
입은 일차적으로 먹는 행위를 가능케 한다. 어떠한 존재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단지 생존을 위한 먹는 행위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입은 말하는 행위를 가능케 한다. 예컨대 이런 장면.
“당신헌티 내가 겁나게 잘못혔고만.”
“뭐, 뭐시라고? 느그 아버지가 시방 뭐시라고 허냐?”
“내가 겁나게 잘못혔다고.”
내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빈말이라도 좋으니 잘못했다는 말이라도 해보라고 하면 앞으로 또 그럴 것인데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던 아버지였다.(?쑥대머리 연가? 중)
‘아버지’의 삶은 ‘어머니’의 신산함을 통해서 유지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아버지에게 여전히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아닌 “옥주”이며, 일상이 아니라 “서편제”의 세계이다. 그러나 입은 일차적으로 먹는 행위를 위해 존재하기에, 중요한 것은 “옥주”와 “서편제”가 아니라 바로 “어머니”와 일상의 세계이다. 하지만 입은 그 이상의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 “잘못혔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말하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인간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교감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입은 “막걸리”를 먹는 행위뿐 아니라, “잘못혔다고” 말하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그 존재 이유를 획득한다. 그런데 입은 이뿐 아니라 더욱 놀라운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답답해서 옥탑방을 나선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냉장고에서 꺼내온 소주병 뚜껑을 비틀어 땄다. 살금살금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줌마, 저도 한 잔만 주세요. 나는 하나 가득 소주를 부어 인경이에게 내밀었다. 아이는 제법 캬, 소리까지 내면서 단숨에 마셔버렸다. 한 잔 더 줄까? 아뇨. 아이는 교복차림이었다. 수선을 했는지 조끼의 길이가 짧아 블라우스가 삐져나왔다.(?벽? 중)
“나”와 “아이”는 입을 통해 일차적으로 “소주”를 함께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입을 통해 이들은 ‘대화’를 수행할 수 있다. 그 대화는 예컨대 영어조기교육을 통해 수행되는 “Who are parts of our family?”(?증후군?)와 같은 형식을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캬” 소리야말로 타자들이 대화하는 방식이다. 이 대화를 통해 비로소 인간은 타자와 교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이 교감은 입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단독자들의 연대와 접속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캬” 소리의 자리에 키스를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게 권영임의 소설은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으로, 나아가 키스하는 입으로 진화하는 행위를 증언한다.
4. 그러니, 진짜 키스하러 가자
그러니, 소설을 통해 타락한 키스를 넘어서 타자와 접속할 수 있는 본래의 숭고한 키스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으니, 이제 ‘진짜’ 키스를 하러 갈 때이다. 교환가치에 의해 상품으로 전락한 키스가 아닌, 하층 여성과 청년실업자와 구조조정의 희생자와 기러기 아빠와, 그리고 온갖 소수자들이 서로의 마주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킬 수 있는 그런 키스. 세계에 던져진 단독자가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접속과 연대의 키스. 그리하여 타락한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역능의 발현을 위한 키스.
?키스하러 가자?의 ‘나’가 다음에 수행할 키스는 마땅히 이런 키스여야 하지 않을까? ?거미의 집?의 ‘은수’와 ‘S’가 다시 만나 행할 키스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집을 나간 ?벽?의 ‘인경’이가 처음 맞을 키스 역시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몫이 아닐까? 그러니, 이제 진짜 키스하러 갈 때이다. 만약 여전히 소설의 힘을 믿는다면 말이다.
장성규, 문학평론가, 2007년≪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본문 평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