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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鳴梁) 이순신(李舜臣)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명량(鳴梁) 이순신(李舜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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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12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298쪽 | 148*210*20mm
ISBN13 9788968491634
ISBN10 896849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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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노기욱
1957년 전남 무안 출생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원 문화재학박사
현)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원 문화재학협동과정 강사
현) 광주지방공무원교육원 강사
현)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선임연구원
현) 전라남도 문화연구소 소장
nogiuook@hanmail.net

주요 저서 및 논문
무안군지ㆍ보성지ㆍ금계집ㆍ지헌집ㆍ양장군실기 등 다수번역
광양민과 어영담의 초계활동
임진의병장 노인(魯認)의 중ㆍ일편력과 대외복수책
이순신의 수군재건 활동과 명량대첩(역사문화학회)
전남의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그 정신(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광양ㆍ구례ㆍ곡성ㆍ순천ㆍ보성 이순신 역사교실
충무공이순신 백의종군세미나(2014, 아산 백의종군세미나)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를 조망하다(2014, 통영 한산대첩세미나)
명량 해전의 역사적 의미와 전라도민의 역할(2014, 해남 명량세미나)
충무공이순신 백의종군로 고증(해군본부 역사단)
백의종군로 콘텐츠사업 기초조사서(전라남도)
남도 이순신길 백의종군로 탐방가이드북(전라남도)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서(전라남도)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안내시스템 구축 기본 및 실시설계보고서(전라남도)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구례군 이순신성 어록길 고증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구례군 명협정 고증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구례군 출정장 고증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곡성군 능파정 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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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無湖南 是無國家 鳴梁と 李舜臣

全南大學校 湖南學硏究院 先任硏究員 魯起旭

1597年 7月 16日 日本軍の攻擊で朝鮮水軍が敗戰した. 朝鮮の政府では深刻な
狀況た?と認識して李舜臣を三道水軍統制使に再任命させた.
それで 三道水軍統制使の李舜臣は1597年 8月 3日 全羅道の求禮に入城して水軍の再建のため?力戰を展開した. 李舜臣の部隊は黃大中および軍官9名と兵士6名で始まった. 李舜臣の水軍の再建の計?は日本軍の追擊を振り切って軍士, 軍機, 軍糧, 軍船などを復元することたった. そして, 海?をして日本軍を擊破させて海上?を掌握する計?たった. この計?のため李舜臣はまず兵站を確保するのが 水軍の復?の大切なことだと考えた.
また 水軍の復?のため全羅道の內陸まで出?るかぎりはやく移動させて軍士を充員させることたった. そして, 沿海岸まで南下して軍機, 軍糧, 軍船などを確保したし, 兵力と武器の回收のため內陸の?のところにある官?まで行って物資を補充させた. また近接まで追擊してくる日本軍を下げてはやく兵士を移動させた.
李舜臣は求禮から谷城, 鴨錄, 谷城の縣?, 谷城の玉果, 谷城の江亭まで移動しながら兵力を確保させた. そして富有倉から順天府まで移動する間, 武器と大砲, 火藥, 長片箭を求めた. また李舜臣は食糧の倉庫がある沿海岸まで移動した. 寶城の兆陽倉に到着して軍糧を求めた. 最後には軍船の確保のため寶城軍營仇未に行った. そこで 慶尙右水使の裵楔の部隊と合流するように約束をしたが裵楔は?なかった. 結局李舜臣は部下の馬河秀の4名の子供と一?に鄕船10隻で長興の會寧浦まで行った. 長興の會寧浦て?裵楔の艦隊8隻と金億秋が集めた4隻の船を含めて全部12隻を集めた. 12隻の船を龜船で新しく製作したら敵の攻擊から安全に防御することが可能になった. 追加して鹿島萬戶と言う艦船1隻が入って合計13隻になった. 海上で起動訓練のため利津の於蘭浦などを回って8月 29日には朝鮮の水軍を碧波津まで移動させた. 日本の水軍は碧波津にある朝鮮の水軍に何回も夜間の奇襲作?を展開した. しかし, 朝鮮の水軍の警戒と反擊によって逃走した.
9月 15日 朝鮮の水軍は右水營から統制營まで移動した. 朝鮮の水軍は海上の起動訓練が終わってから避難船100餘隻で洋島の西側の海の通路を塞がった. また右水營の西側の海に船が避難した模?で船?を配置した. それは朝鮮の水軍で僞裝するためたった.
9月 16日 朝早く日本の水軍が鳴梁に進入した. 李舜臣は出?の命令をくだした後, 先頭に立って鳴梁にむかった. そのとき鳴梁の潮流はほとんど停潮期で?かなことだった. 海の中に日本の水軍の?船が133隻で確認された.
いよいよ朝鮮と日本の海?が始まれた. 最初は日本の水軍が朝鮮の水軍を包?して金億秋, 金應歟, 安衛の船などを攻擊した. しかし, 朝鮮の水軍も鹿島萬戶に?っている宋汝悰と平山浦代將の丁應斗の船が協力して火砲を射って, また朝鮮の水軍は地字銃筒と玄字銃筒などを射った. 雨あられとように矢も射った. 結局, 日本の水軍を擊破させた.
李舜臣は日本の水軍の將帥の來島通總を射殺して船端に高く吊した. この?子をみた日本の水軍の士氣が極度に低下した.
また劣勢の兵力を指揮した李舜臣は?鎖を鳴梁の夾水路に敷いておいた. 鳴梁海?がはじまったら?鎖を引き寄せながら日本の水軍の中央にある船端を攻?した. 夾水路の障碍物と不規則な潮流のながれによって日本の水軍の陣形と隊伍が崩壞になった. 李舜臣は障碍物と海の速い流れを利用して日本の水軍を攻擊した. ついに鳴梁??で日本の水軍4,000名を射殺し, 日本の?船31隻を沈沒させた. 結局, 三道水軍統制使の李舜臣は全羅道で兵站物資の復興を通して水軍を再建しようとした計?を達成することが出?た.
1597年 8月 3日 李舜臣は王?から敎書をもらった15日後, 水軍の陣營を新しく整えた. そして海上の哨戒と巡擦活動を始まった. 1ヶ月ぶりに鳴梁大捷という世界的有名な海上??で勝利に導いたことた. 全南地域で活躍した三道水軍統制使の李舜臣がこのように?略を成功させたのは全南の民衆たちの積極的な協力で成ったのを分かった.

主題語 : 寶城, 鳴梁, 軍營仇未, 利津, 右水營, 於蘭浦, 金億秋, 金應歟, 安衛, 來島通總, 黃大中, 鐵鎖, 停潮期, 龜船


1장 보성 [방부인전] 열선루 길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덕수이씨(德水李氏)로 1545년(인종1) 3월 8일(양력 4월 28일) 서울 남부 마르내골(乾川洞)에서 태어났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자는 여해(汝諧)이다. 여해는 ‘너로 하여금 세상이 화평하게 되리라.’라는 뜻이다. 이순신과 같이 동문수학한 류성룡(柳成龍)은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자라면서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라고 하였다. 명나라 진린(陳璘)제독은 이순신을 ‘노야(老爺)’라고 하였으며, 전라도 피란민은 ‘이야(李爺)’라고 하며 그를 따랐다.
이순신의 가계(家系)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이었다. 5대 조부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李綱)는 병조참의(정3품)를 지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기록에 의하면 류성룡이 선조에게 이순신을 “성종때 이거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벼슬하였다고 하지만 미관말직의 평시서(平市署) 참봉(參奉, 종8품)에 그치는 정도였다. 집안 대대로 고위직을 역임한 것에 비해 낮은 관직이었다. 그것은 중종 때에 발생한 기묘사화(1519)가 원인이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면서 왕도정치 실현과 개혁정치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조광조 일파로 간주되어 할아버지 이백록도 사림과 친교를 맺었다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하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은 음직으로 벼슬하였지만 부친 이정(李貞)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순신 할아버지에게 일어난 불운이 아버지를 거치면서 집안은 기울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 이정의 서울 생활은 자연히 어려운 여건에 처하게 되어 이순신이 8세가 되던 해 가족이 이순신의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사화로 죽임을 당해 아버지 이정은 벼슬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변씨(草溪卞氏)는 아산 지역의 명문가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이순신은 아들 넷 중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이순신에게는 희신(羲臣)ㆍ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다. 이순신의 아버지는 집안의 번성을 기원하며 중국 왕들의 이름(복희씨, 요왕, 순왕, 우왕)을 따서 네 아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순신의 외가가 있는 곳은 서울에서 300리 길인 방화산(蒡華山) 기슭에 위치한 충청도 아산 염치면 백암리이다.

1. 보성군수 방진의 외동딸과 결혼

이순신이 21세 되던 해, 1565년(명종20)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딸 상주방씨(尙州方氏)와 결혼을 한다. 이순신의 장인 방진은 1530년경에 보성군수를 지냈다. 방진의 묘소 비문에 의하면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이순신의 중매를 섰다고 한다. 이준경과 방진은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방진의 사위가 된 이순신은 장인의 정신적 격려와 경제적 후원 속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처가에서 지내면서 무예를 연마하였다. 장인 방진과 장모 남양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후손이 없는 처갓집(현재 아산 이 충무공 고택)은 이순신의 본가가 되었다. 그리고 장인, 장모 묘소도 이순신이 외손봉사(外孫奉祀)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무과 시험 공부를 22세 10월부터 시작하였다. 이순신이 무과를 선택한 이유는 부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충무공전서』의 「방부인전」에 이순신의 장인, 방진의 활솜씨에 대한 내용이 있다. 방진은 조선의 명궁수로 이름이 난 관리였다. 어느 날 방진의 집에 화적(火賊)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왔다. 방진이 화살로 화적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딸에게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화적들이 종과 내통해 화살을 몰래 훔쳐 나갔으므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방진의 외동딸이 베틀의 도투마리에 뱁댕이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 양 다락에서 힘껏 내던지며 큰 소리로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하고 소리쳤다. 방진의 활솜씨를 두려워했던 화적들은 화살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알고 곧 놀라서 도망갔다. 이때 딸의 나이 겨우 12세 때 일이다. 방씨부인은 어릴 때부터 영민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이순신이 결혼하고 23세가 되던 해, 큰 아들 이회(李?)가 태어났다. 4년 후인 이순신 27세가 되던 해, 방씨부인은 둘째 아들 이열(초명; 李蔚)을 낳았다. 첫째 이회는 현감을 지냈으며, 둘째 이열은 정랑(正郞)에 이르게 되었다. 셋째 이면(李?)은 힘이 장사이며 이순신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딸은 사인 홍비(士人 洪?)와 결혼하였다.

2. 무과 합격 후 뒤늦게 오른 관직

이순신이 28세가 되던 해, 무과 공부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1572년(선조5) 무인 선발 시험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4년 뒤 32세가 되던 해, 1576년 2월에 치러진 식년시 무과에 병과 4등으로 급제한 뒤 그해 12월 종9품 권관(權管)이 되어 함경도 삼수(三水) 고을 동구비보(童仇非堡)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순신은 삼수에서 3년 동안 근무하였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북방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 훈련을 철저하게 시행하였다. 그 무렵 함경도 감사로 부임해 온 이후백(李後白)은 자신의 관할 진을 돌며 군기 검열을 하였다. 변방 장수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게 하는데 매우 엄정하여 군기 검열에 곤장을 맞지 않는 군관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변방에서는 함경도 감사 이후백을 ‘곤장 감사’라고 하였다. 그런데 동구비보에서 검열을 마친 이후백 감사는 이순신을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그가 건의하는 말까지 들었다.
이순신은 “사또의 형벌이 너무 엄해서 변방 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후백 감사는 웃으면서 “그대 말이 옳다. 난들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벌만 주겠는가?”라고 하면서 군기가 엄정한 이순신을 격려하였다. 임무 수행에 나무랄 데가 없었던 것이다.
강진군 작천면 박산리에 이후백의 학문을 기리는 박산서원이 전하고 있다. 이후백은 16세 때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후 할머니를 따라 외가인 전남 강진군 작천면 박산 마을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순신은 삼수에서 3년을 지내고 35세가 되던 해 이미 세 아들의 아버지였다. 1579년(선조12) 2월 서울 훈련원으로 전입되어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가 되었다. 한 직급 위인 종8품인 훈련원봉사로 임명되었으나 상관인 병조좌랑(兵曹佐郎) 서익(徐益)과 인사 문제로 서로 맞서게 되었다. 이조와 병조의 좌랑은 정랑과 함께 인사 행정을 담당하였다. 서익은 자신과 사사로운 관계의 훈련원 사람을 서열을 무시한 채 참군에 천거하라고 이순신에게 지시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아래 있는 자를 건너뛰어 천거하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누락되어 공정하지 못하다.”라고 완강히 버텼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식자들은 이 일로 차츰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자기 딸(庶女)을 이순신에게 시집보내려고 중매인을 보내어 인척 관계를 맺으려 한 일이 있었다. 이는 병조판서인 김귀영도 이순신의 인품을 높게 평가하여 사위로 맞이하겠다는 뜻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내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왔는데 어찌 감히 권세 있는 집안에 의탁하여 승진을 도모하겠는가.”라고 하며 중매인을 돌려보냈다.
이순신은 훈련원봉사 8개월 만에 충청병영이 있는 해미(海美)에 충청도병사(忠淸道兵使) 군관(軍官)으로 전출되었다. 그곳에서 10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당시 이순신이 거처하는 방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고, 다만 옷과 이불뿐이었다. 휴가를 얻어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 갈 때는 지급 받아 남은 양식을 여러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2장 고흥 발포진(鉢浦鎭) 거북선 선소 길

이순신이 36세 때, 1580년(선조13) 7월 발포(鉢浦) 수군만호(水軍萬戶,종4품)로 부임해와 18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이순신은 함경도 삼수, 서울의 훈련원, 충청도 병마절도사 휘하에서 육군으로 지내다 수군으로서 처음 발포에 발령을 받았다.

1. 해군 지휘관이 되어 바다를 지키는 발포만호

이순신이 있었던 고흥 발포만호성(鉢浦萬戶城)은 바다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관방 시설로 정면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고흥 수덕산(修德山) 남쪽 사면 끝자락, 도화면 발포리 성촌마을을 감싼 모양이다.
발포진성은 『성종실록』에 “전라도의 발포성(鉢浦城)은 둘레가 1천 3백 60척이며 높이는 13척이었다.”라고 하였다. 1976년 이충무공 유적보존위원회를 결성하여 유적지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1977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에 의해 확인된 성벽은 동쪽 벽과 남쪽 벽은 민가의 담으로 이용되고 나머지는 거의 원형 상태로 남아 있다. 이 마을 느티나무 아래 비석거리에는 ‘이충무공 머무시던 곳’을 기념한 기념비와 조선 후기 만호비가 남아 있다. 발포진성 뒤편에는 충무사(忠武祠)가 새롭게 단장되었다. 그리고 포구에는 발포 역사전시체험관이 세워졌다. 또 해안에는 수군 선박 대피 장소로 쓰였던 굴강(屈江)이 남아 있다. 발포만호 시절 이순신에 관련된 일화들이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다.
어느 날,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成?)이 전령을 보내 “거문고를 만들고자하니 관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하였다. 이순신은 “이 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여러 해 동안 식재한 것을 하루아침에 벨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며 전령을 돌려보냈다. 이는 평소 전선과 무기 만들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가벼운 판목 재료로 전선 덮개용으로 알맞은 오동나무 벌목을 당연하게 거부하며 공물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전라좌수영 산하의 5관은 순천, 낙안, 보성, 광양, 고흥이며 5포는 사도, 여도, 녹도, 발포, 방답진성이다. 전라감사와 전라수사는 6월과 12월에 각각 5관 5포에 주둔하는 만호 이상의 변방 장수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조정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해 늦가을, 해상 관방 시설을 점검하러 온 전라감사 손식(孫軾)이 능성현청으로 발포만호 이순신을 불렀다. 이때 손식은 이순신에게 전라도 해안 지역의 전술에 대해 묻고 진도(陳圖)를 그려보게 하였다. 이순신은 주사(舟師)의 병기와 기계(機械)를 설명하고 진도를 그렸다. 마침내 전라감사 손식은 이순신에게 “내가 잘못 알았소. 내가 일찍이 그대를 바로 알지 못했소.”라고 하였다. 전라감사 손식은 이순신이 전선과 수군 체제, 무기 체계의 방비를 잘 갖추고 있으며 주사의 병기와 기계(機械)가 정밀함에 감동하였다.
어느 날, 전라수사 이용은 전라좌수사 관할 하에 있는 발포에 가서 수군의 전선과 군기를 검열하였다. 그 결과 발포 수군의 판옥선, 전선, 군기 등이 정밀하였다. 단지 농사일로 4명의 궐석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근무 성적은 최하위로 평가되었다. 이때 전라도사 조헌(趙憲)은 “우리 도에서 이순신이 군사를 가장 잘 다스리는 장수이다.”라고 하였다. 전라수사 이용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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