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팀의 응원은 비극적일 정도로 비장하여 나 같은 영문학도가 반길만한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지는 팀에 감정적으로 이입을 하다 보면, 팀이 잘 할 때는 더 기쁘고 못 할 때는 내 감정의 곡선도 더 바닥을 친다. 그 절망감을 더 절실히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우승은 금보다도 더 귀해진다. 가뭄 중의 단비이자 기근 중의 식량인 셈이다. 긴 연패에 빠질 때는 전쟁 포로의 멘탈을 갖게 된다. 겉으로는 단호하고 의연하면서도, 속으로는 다시 자유의 빛을 볼 수 있을지 의심하는 상태 말이다. 한 번만 더 패하면 집어치울 거라고 협박함과 동시에, 영혼을 바쳐서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이기게 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게 된다. 이 정도로 필사적인 상황에서는 한 번의 승리에도 얼마든지 격하게 열광할 수 있는 법이다.
p71
잘나갔던 역사를 가진 별 볼 일 없는 팀에서 뛴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나도 확실히 안다. 홈경기인데 관중석에 홈 팬 보다 원정 팬이 더 많은 광경을 벤치에서 올려다보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안단 말이다. 동시에 단 몇 명의 목소리 큰 팬들이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우리 팀 자리에서 정말 한 명이라도 큰 소리로 응원을 해 주고, 깃발을 흔들고, 농담을 하고, 심판에게 야유를 하고, 우리가 점수를 낼 때 마다 일어서 주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오늘 딱 하루만이라도 그런 존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초반에는 도저히 신이 나지가 않았지만 말이다
p86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응원을 리드하는 매력에 대해 설명하는 건 어렵다. 무언가 맡았기 때문에 신이 난 그런 유치한 감정 이상이며 자아의 실현이다. 단상에 오를 때면 뭔지 모를 에머슨풍의 성취감, 무언가를 초월한, 어쩌면 목적론적인 감정을 느낀다. 솔직히 흥분된다. 무대에 오르는 건 첫 키스, 대학 합격 통지서, 그리고 박병호의 홈런을 한 데 묶어 놓은 그런 느낌이다.
p223
3회초, 만루 상황. 나는 무대에, 박병호는 타석에 섰다. 시즌 개막전이 일주일 넘게 지나도록 박병호의 홈런 소식은 깜깜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고 있지 않은 1인이었다. 응원하는 선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어주는 것 외에 해 줄 수 있는 게 있나? 없다! 없는 것보다 더 좋지 못한 게 있다. 바로 의심이다. 밤을 지새우게 만드는 의심. ‘박병호는 칠 거 야.’ ‘쳐야만 해.’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해가 늘 동쪽에서 뜨듯이 박병호는 제 모습을 찾았다. 1-0 카운트에서 제2구를 받아친 게 좌측 파울 폴(foul pole) 안쪽으로 아슬아슬하게 휘어 들어갔다. 시즌 1호. 게다가 만루 홈런.
p244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전부 밀어버리고 주차장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무등야구장은 인조 잔디로 된 조그만 필드를 둘러싼 (주차장만큼이나 낮았던) 원시적인 콘크리트 더미였다. 그곳의 상태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dilapidated(다 쓰러져 가는)’와 ‘derelict(버려진)’ 사이 어디쯤이다. 대구의 시민야구장과 비슷한 외관이었으나 제대로 작동하는 변기는 3분의 1도 안 됐다.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일부 건물들은 단순하고 질서가 있어 ‘quaint(예스러운)’이나 ‘charming(매력적인)’이라는 단어로 묘사할 수 있겠지만 무등야구장의 매력은 순전히 인류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대충 쌓아 올린 곳에서 편하게 앉아 경기를 즐길 수 있다는 데 완전히 매료되었다. 할머니 댁 창고에서 썩고 있는 나무 판넬로 된 다이얼식 흑백 텔레비전을 접했을 때 느끼는 그런 매료됨 말이다. 물론 응원하는 팀이 잘나갈 땐 거의 아무데서나 앉아서 봐도 상관이 없다. 그리고 타이거즈 구단은 10번 우승할 동안 무수한 경기를 이겼다. 이런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이 구장에 오면 깨졌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거부감이 들 만했다.
p276
2012년도 시즌 테드 스미스의 마지막 소식은 KBS 이기호 캐스터가 전달했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경기를 한화와 맞붙었다. 1대1 무승부로 끝났다. 나는 무승부가 싫다. 차라리 지는 게 낫다고 거의 생각한다. 하지만 류현진이 한국에서 던진 마지막 경기를 직관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좋다. 생중계에 잠깐 잡히면서 이기호 캐스터는 다음과 같이 질문 했다.
“이 분 이제 내일로서 넥센의 정규 시즌 경기를 끝내는데요. 내년 시즌까지 어떻게 기다리죠, 이 분?”
이병훈 해설 위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야구 끝나면 농구장이나 뭐, 배구장에 가지 않을까요?”
“아니면 도미니카 정도에 가서 보이지 않을까요?” (웃음)
그땐 여행 계획이 분명히 있었지만 봄이 올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당분간은 조용히 입 다물고, 책상 앞에 공부하러 앉았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