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죄를 범하지 않을 자유가 인간에게 있다면, 죄와 교수대를 동시에 바라보면서도 죄를 범하고야 마는 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에 끌려다니면서, 단 한순간도 기존의 진행 방향과는 다른 쪽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권한을 갖지 못하네. 자연에 필요하지 않은 미덕은 단 하나도 없거니와, 뒤집어 말하자면, 그 어떤 악덕도 자연에게는 필요한 것이지.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본문 34쪽)
(…) 모든 인간의 다양한 부류를 심도 깊게 연구하고 그것을 단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면, 아마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되겠지만, 결국에는 가장 비천한 동물 종으로까지 내려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맞닥뜨리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밝은색들이 그보다 어두운색들의 단계적 변화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 자신도 사실상 짐승의 아주 괜찮은 한 종류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이런 고찰은 인류 입장에서 참 괴로운 것이겠으나, 그렇다고 그 현실성이 덜하겠는가? 여기에 더해 양극단의 지적 능력, 즉 짐승 중에서 가장 뛰어난 녀석의 본능과 인간 중에서 가장 모자란 자의 본능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연이란 정말 오리무중이거니와, 우리의 어리석은 허영과 삶의 규범들 태반은 그보다 훨씬 더 터무니없다는 걸 자인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이성(理性)은? 이 빛나는 이성은? 혹자는 그렇게 반박할지 모른다. 오, 인간이여, 그대가 내세우는 그 잘난 이성, 우리가 가진 성벽(性癖) 때문에 툭하면 흐릿해지는 그 존귀하신 이성이란 자연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해로운 선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비교해보면 우리와 비슷하기만 한 동물들보다 우리가 더 나은 점들을 한탄하게 만드는 어쩌면 유일한 자질이 아니고 대체 무어란 말인가? (독서 노트 제4권 혹은 수상록, 본문 47~48쪽)
누군가로 하여금 우리에게 호감을 갖도록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누군가의 적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그 똑같은 감정을 도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내재하는 보편적인 시금석이며, 한마디로 만인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감정이다. 그로 인해, 심지어 가장 덜 정치적인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이는 같은 인간들과 더불어 살아갈 간단한 방법을 손쉽게 터득할 수 있다. 세상을 살면서 고려해야 할 것은 딱 그 두 가지 이치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다 거기에서 유래한다. (독서 노트 제4권 혹은 수상록, 본문 56쪽)
여기 수록된 다양한 글들 하나하나가 엄청난 철학적 노고의 산물이지만, 종종 그 양상이 달리 적용되었기에 어떤 이들은 그것들이 동일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잘못된 생각이다. 저자는 자기 자신의 철학이 아니라, 각 글에 어울리는 철학을 그때그때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아메리카에 관한 소논문에 적합한 견해가 교육에 관한 편지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저자는 언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할 수 있겠다. 스스로 자제할 때인가, 아니면 모든 베일을 찢고 나설 때인가? 어느 쪽이든 독자에겐 상관없는 문제다. 제각각 글의 특성에 맞는 견해를 그때그때 제시함으로써 표제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방법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어떤 종류의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고, 이성에 충실해서든 그 밖에 다른 동기에서든, 편견을 완전히 말살해버린 사람들이라면 이 문집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글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편견이 아직도 일부 남아 있고, 철학적 사고의 주변부만을 기웃거린 사람들이라면 다소 평범한 견해에 머물 것이며, 대개는 누구나 그런 정도로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미리 말해두지만, 일부 부류는 결코 그렇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_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뒹굴던 그 진창 속에 그대로 놓아두기로 한다. 거기서 그들은 시대가 저물 때까지 지지부진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남에게 불쾌감만을 유발할 뿐인 자들의 비위를 굳이 맞추려 애쓸 필요가 있겠는가? (어느 문인의 잡문집, 본문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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