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7 : 세면대를 보며 그는 아련한 생각에 잠겼다. 동료 수감자들 중에 이런 비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고상한 뉴욕 호텔의 고상한 투숙객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처럼, 볼가 강변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일반범의 세계와 필립 스탁의 디자인 속에서 유영하는 멋쟁이 작가의 세계, 이토록 이질적인 세계들을 두루 경험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틀림없이 많지 않아, 라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 그는 자긍심을 느꼈다. 그 심정, 나도 이해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쓰려는 것이다.
P.91 : 온전히 이런 시인의 삶을 살기 위해 그에게 필요했던 딱 한 가지, 우중충한 우크라이나 농사꾼의 성이 아닌 참신하고 그럴듯한 성이었다. 하룻저녁은, 안나의 집에 모인 패거리들이 재미삼아 각자 성을 하나씩 새로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로냐 이바노프는 아제야로프가, 사샤 멜레호프는 부한킨이, 에두아르드 사벤코는 에드 리모노프(리몬은 레몬을, 리몬카는 수류탄을 뜻하는 만큼, 그의 뾰족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고려한 작명이었다)로 재탄생했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의 재미로 끝냈지만 에두아르드는 이때 만든 필명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는 이름마저도 남의 힘을 빌리지 않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신바람 나는 삶의 방식은 아니지만, 괜찮았다. 다들 요령껏 살았다. 정말 어리석은 짓만 안 하면 크게 잘못될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도 시큰둥했고, 정치 얘기는 그저 술자리의 안줏거리에 그쳤다. 무기력이 존립 근거인 이 체제가 앞으로도 몇 세기 동안은 건재하리라고, 솔제니친을 뺀 모두가 확신하던 시절이었다.
---본문 중에서
세면대를 보며 그는 아련한 생각에 잠겼다. 동료 수감자들 중에 이런 비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고상한 뉴욕 호텔의 고상한 투숙객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처럼, 볼가 강변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일반범의 세계와 필립 스탁의 디자인 속에서 유영하는 멋쟁이 작가의 세계, 이토록 이질적인 세계들을 두루 경험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틀림없이 많지 않아, 라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 그는 자긍심을 느꼈다. 그 심정, 나도 이해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쓰려는 것이다. - 본문 37쪽
온전히 이런 시인의 삶을 살기 위해 그에게 필요했던 딱 한 가지, 우중충한 우크라이나 농사꾼의 성이 아닌 참신하고 그럴듯한 성이었다. 하룻저녁은, 안나의 집에 모인 패거리들이 재미삼아 각자 성을 하나씩 새로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로냐 이바노프는 아제야로프가, 사샤 멜레호프는 부한킨이, 에두아르드 사벤코는 에드 리모노프(리몬은 레몬을, 리몬카는 수류탄을 뜻하는 만큼, 그의 뾰족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고려한 작명이었다)로 재탄생했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의 재미로 끝냈지만 에두아르드는 이때 만든 필명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는 이름마저도 남의 힘을 빌리지 않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 본문 91쪽
신바람 나는 삶의 방식은 아니지만, 괜찮았다. 다들 요령껏 살았다. 정말 어리석은 짓만 안 하면 크게 잘못될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도 시큰둥했고, 정치 얘기는 그저 술자리의 안줏거리에 그쳤다. 무기력이 존립 근거인 이 체제가 앞으로도 몇 세기 동안은 건재하리라고, 솔제니친을 뺀 모두가 확신하던 시절이었다. - 본문 97쪽
내가 이미 앞에서 비슷한 장면을 한 번 쓴 것 같다. 픽션을 쓸 때는 선택이 필요하다. 주인공이 한 번은 바닥으로 추락할 수 있다. 권장 사항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두 번은 과하다. 반복의 위험이 있다. 현실에서, 나는 리모노프가 여러 번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생각한다. 여러 번 넘어지고, 의지가지없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그토록 망가지고, 처절하게 외롭고 곤궁해도, 역정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 필연적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힘을 얻고, 언제나 털고 일어서고, 언제나 다시 전진한 것은 내가 리모노프를 존경스럽게 생각하는 점이다. - 본문 213~214쪽
우선,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모범적인 집사 에두아르드가 지붕 밑에 있는 그의 방에서 내려와 2층에 있는 마스터 베드룸을 차지했다는 사실. 주인의 실크 시트 위에서 뒹굴고, 주인의 욕조에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주인의 옷을 걸쳐 보고, 주인의 폭신폭신한 카펫 위를 맨발로 걸어다녔다. 주인의 서랍을 뒤지고, 주인의 샤토 마르고 와인을 꺼내 마시고, 당연히, 여자들도 불러들였다. 거리에서 낚은 여자들, 그것도 더러는 두 명을 한꺼번에 데려와 섹스를 하면서 킹 사이즈 침대 위에 적당한 각도로 걸려 있는 베네치아산 대형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올려다보았고, 여자들 앞에서 집주인은 아니라도 집주인의 친구 정도는 되는, 동급의 사람인 양 행세했다. - 본문 216쪽
알리에의 집과 가깝다 보니 에두아르드는 정기적으로 편집 회의에 참석했고, 이따금은 나타샤도 데려갔다. 갈수록 편안하게 느껴졌다. 극좌와 극우가 어우렁더우렁 술에 취하고, 극히 상반되는 의견들도 논쟁이라는 상스러운 형식으로 귀결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교환되었다. 사람들은 알리에한테서 원고료를 떼이지 않는 비법(한 손으로 기사를 내밀면서 다른 손으로는 지폐를 받아 쥔다는 솔레르식 기술)을 공유하고, 알리에와 대판 싸우고, 사이가 틀어지고, 화해하고, 불면증 환자인 그에게서 새벽 다섯 시에 걸려 오는 전화를 자다가 일어나 받았다. 인쇄업자한테는 대금 결제를 못 하고, 변호사한테는 수임료 지급을 못 하고, 채권자들은 장사진을 치고, 명예 훼손 소송이 줄을 잇는 속에서 어느 누구도 다음 호의 운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보주 광장의 풍경까지 한몫해 에두아르드는 청소년 시절에 열광했던 『삼총사』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 본문 275쪽
옛날에는 사는 게 고생스러웠어도, 구시렁구시렁 불평은 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자긍심을 느꼈다. 가가린,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강한 군대, 광활한 제국의 영토가 있다는 사실이, 서양보다 공정한 사회에서 산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글라스노스트 이후로 고삐가 풀린 표현의 자유 때문에 맞은편의 사내 같은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1917년부터 이 나라를 지배한 자들은 모두 사디스트고 살인자이며 작금의 참패를 불러 온 장본인이라는 사고가 각인되었다고 에두아르드는 판단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