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느닷없이 흐려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해도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로서의 연속성을 띠게 마련이다.
--- p.30
잘못 본 것일까. 아, 모래 위에 앉아 깜빡 졸았나 보다. 졸고 있는 사이 보았다. 웬 벌거벗은 아이 하나가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수평선 끝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달이 떠오르자 아이의 모습은 서서히 시야에서 희미해져갔다.
--- p.132
오랫동안 나는 오직 나만의 공간을 원했었다. 서른 해 동안 나는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있거나 혼자가 되지 못하는 부자연스러운 여럿 중의 하나였다. 그렇듯 불연속적인 상태의 지루한 지연. 마디마디 끊어져 나가는 허망한 생의 순간들. 그때마다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시간은 한 움큼씩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곤 했다. 김현필이 실종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오미향의 신변을 확보하고 있으면 최후의 경우 빠져나갈 방법은 생기겠지. 화병에 꽃을 꽂고 나서 나는 침대에 누워 포도주를 한잔씩 따라 마셨다.
--- p.87
어떤 사람에게는 그토록 평범한 인생이라는 것이 평생을 밀어넣어도 얻어지지 않는 일인 것이다.
--- p.217
어느 순간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평범한 삶으로 부터 멀어져버렸죠. 그러고 나서 좀이 먹듯이 못쓰게 변해가는 자신을 무기력하게 바라볼수 밖에 없게 되었어요. 삶은 한 순간이에요. 단 한순간의 어긋남으로 돌이킬수 없는 길을 가게 되죠.
삶은 많은 경우 선택할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불행은 그런식으로 엉겁결에 닥쳐온다
--- p.177. P 135
아이는 사무친 눈으로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자궁 안으로 기어들어왔어요. 그러자 무서운 고통이 찾아왔죠.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 말예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고통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마침내 황홀한 일체감이 몸을 채우기 시작했어요. 그 아이와 제가 하나로 일치된 거죠. 계란 껍질 속으로 노른자가 들어오듯이 말예요.
--- p.162
삶은 많은 경우 선택할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불행은 그런 식으로 엉겁결에 닥쳐온다. 당신을 생각할라치면 가끔 마음이 노인네 머리처럼 하애지며 찔끔 눈물이 나올때가 있습니다.언제 다시 만나게 될런지요. 나는 줄곧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고백이 되는
셈이지만 지금은 이런 식으로 쓸 수밖에 없군요, 어수선한 쳔지, 곧 후회하게 될런지도 모르지만 그냥 이내 부치기로 합니다.
--- p.
그래, 나도 많은 먼 곳들을 돌아서 왔다.
그러나 일일이 얘기하지는 않겠다.
어두운 밤 낯선 강기슭에서 배를 타고 혼자
강을 건너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내가 사랑했던 이들은 한결같이 그렇게들
살아왔다고 얘기했다.
책 표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