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널리즘은 물질적 보수 이상의 무엇, 단순한 생활 방편 이상의 어떤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내가 얻은 결론은 저널리즘이 비단 하나의 직업일 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의 길이라는 것이다. 사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마음 없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직업이라는 점이다. 다른 어느 직업보다도 고된 일이오, 다른 어느 직업보다도 정신적 수련을 요하는 일이오, 때로는 자아 부정과 희생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 나는 저널리즘이 어느 직업보다 고결한 직업임을 자위하고 싶고 고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1부 ‘젊은 기자에게 보내는 글’」중에서
오늘날, 언론이 흔히 모멸의 대상이 되고 냉소의 존재가 된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언론의 역할과 그 위력을 제대로 알고 보면, 그런 모멸과 냉소는 곧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 다시 말해 아무리 냉소할 존재일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 그 지배하에 살고 있어 세상만사 언론 활동의 매개적 기능 없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그런 발언의 동기였다고 믿는다.
그렇다. 신문 방송 등 언론은 모든 사람에게 외부환경을 제공, 인식시키는 데 결정적 위력을 갖는다. 객관적으로 ‘사실’이 있든 없든, 어떤 ‘사실’이 뉴스라는 이름으로 어느 한 사람의 머리에 도달하면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사실’이 되고 만다는 것, 반대로 그의 머리에 도달치 않으면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 매우 평범하지만 가공할 진리가 아니겠는가. 언론의 생명이 객관적 공정보도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사실’의 주관적 취사선택으로 얼마든지 국민의 인식을 어떤 방향으로 잘못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제2부 ‘관영방송 체제 청산돼야‘」중에서
언론업을 다른 전문업처럼 일정한 기준이나 틀 속에 넣어 획일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 고도의 윤리의식을 필요로 하면서도, 누구에게나 분명한 행동 강령이나 기술의 수준을 적용시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으로 저널리스트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직업적 필수조건이 있다. 가령 억강부약하고 공명정대한 자세라든가 신의가 있다든가를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직성(integrity)을 들고 싶다. 그들이 옮겨주는 뉴스가 진실성을 토대로 하지 않는다면 대중이 판단할 자료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대단히 해로운 것이 되고 만다. 언론직 종사자의 첫 번째 사명이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뉴스를 때 묻히지 않고 옮겨주는 뉴스의 순결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바로 진실의 추구에 있다. 진실의 보도는 정확해야 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공정하여야 한다.
---「제2부 ‘깨끗한 언론을 위하여‘」중에서
나는 반발했다. 개헌 찬반이 국민적 초미의 관심사인데 거기에 대해 아무런 의사표시도 못 하는 비겁한 동아일보가, 본질문제에 침묵을 지키면서 지엽적인 일을 문제 삼을 때 오히려 영이 서지 않는다고 좀 과한 말로 대들었다. 그 순간, 고 사장의 얼굴색이 벌게졌다. 무척 기분이 상한 것이다. 아마도 ‘비겁한’이라는 형용사가 그의 심기를 몹시 자극한 것 같았다. 순간, 나는 몸을 움츠렸다. 벼락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책상으로 가서 오른쪽 맨 윗서랍에 열쇠를 꽂아넣어 서랍을 열더니 거기서 내가 드렸던 원고를 꺼내지 않는가. 그리고 내 앞에 던지면서, “갖다 내……”라고 말했다. 노여운 목소리였다. 나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갖다 내……”라는 한마디. 내일 사설로 게재하라는 뜻인지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예?”라고 말꼬리를 높였다. 그랬더니, “박 군 소원대로 내일 신문에 내란 말이오.”라는 부연 설명. 약간 좀 부드러워진 목소리. 나는 순간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제4부 미니회고록-군사통치하에서 신문을 만든다는 것」중에서
신군부의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권력 장악에 비판적이던 박권상 선생은 신군부가 통지한 해고대상 1순위 언론인이었다. 선생은 결국 「동아일보」 편집인 겸 논설주간으로 활동하던 1980년 8월 9일 해직되었다.
……(중략)……
선생은 해직 당시를 “언론을 ‘자유·명예·의무’로 연결시키려던 꿈과 이상을 안고 일했지만 사나운 총칼 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아무리 암담해도 비굴해서는 안 돼, 떳떳해야 한다. 죽어도 깨끗이 죽어야지…….” 하면서, 늘 언론인으로서의 자세에 어긋나지 않도록 스스로 채찍질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에게 잔인한 암흑의 세월은 의외로 길었다. 선생에게 박힌 5공 정권의 미운털이 좀처럼 빠지지 않은 것이다. 그에 따라 해직기간이 길어져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음에도 박권상 선생의 언론에 대한 신념과 사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제5부 특별기고 ‘언론인 박권상 선생의 활동과 사상, 그 역사적 의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