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6/30 이상구(flypaper@yes24.com)
'이정국 감독의 생생한 현장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시나리오 창작에 있어 미흡한 재능을 후천적인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위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나같이 시나리오를 창작해볼 생각은 전혀 없더라도 시나리오를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해, 시나리오 읽기의 다양한 각도를 제공하는 방법론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감독?)은 한 문화센터에서 자신이 맡았던 시나리오 창작 강의를 바탕으로 이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러한 이유로 여타의 시나리오 영화 서적과는 달리 눈높이 교육이 철저하게 수행되고 있다. 어렵게 쓰지 않았다.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쓴 시나리오 지침서'라고 책표지에도 인쇄되어 있다. 재미있게..라는 문장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쉽게 썼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쉽게 써서 눈높이를 맞췄다는 사항은 저자 자신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시나리오 쓰기의 노하우(우리말로 짠밥)을 터득해 왔기 때문에 더욱 더 현실적으로 다가 온다. 모짜르트가 아닌 샬리에르형 노력가인 이 저자는 부족한 재질과 창의력을 후천적인 노력과 탐구생활로 메꿔 나간다. 그러한 노력의 산물인 이 책은 아주 다양한 실례, 것두 시대에 뒤쳐지지 않는 최신작에서부터 시나리오의 모범 텍스트로 인정받는 고전까지 하나씩 하나씩 착실하게 다루고 있다. 자신의 히트작이었던 '편지'의 시나리오 창작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수록한 챕터는 시나리오가 씌여지는 과정을 현실감있게 전달하기도 한다. 영화 보고 나서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 필름을 보았을 때의 새로움 같기도 하다. '아...인디아나 존스가 석탄 수레에 실려 쏜살같이 쫓겨 내려 오던 장면은 해리슨 포드도, 스턴트맨도 아닌 고개만 까딱 까딱하는 마네킨이었구나', '이런...쥬라기 공원에서 그 무시무시한 티라노 사우르스는 목밖에 없는 거대한 골무 인형에 불과했잖아..!'처럼 말이다.
이 책의 일차적인 기획 의도는 시나리오를 창작하기 위한 기본적인 프레임을 제공하는 것이겠지만, 저자의 다양한 선험적인 지식과 영화에 대한 따뜻한 시각은 영화 읽기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하기도 한다. '영화를 읽는다'라는 행위에 있어서, 그간 우리는 수도 없이 허탈한 경험을 맛 보았다. 솔직히 나 또한 '굳이 골머리 썩혀 가며 적확한 번역어 찾아 고민하느니, 그냥 편하게 외래어 그대로 쓰자주의'인데도, 그간의 영화 비평에서 보여졌던 방만한 외래어 남발 및 지적 스노비즘에는 기가 질려 버리기까지 했다. 허탈함 그 자체였다.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든지 모르면 물어서라도 읽으면 다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왜 어렵게... 어렵게만 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대체 영화 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 맑스에서 알튀세르까지를 참조해야 하고, 라캉에서 데리다까지 언급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솔직히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래서..나에겐 영화를 볼 때, 시놉시스 이외의 비평은 애써 무시하려 드는 나쁜 버릇이 달라붙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한계를 요령껏 극복한다. 대화하는듯한 친근한 어투의 활용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챕터별로 요약이 잘 돼 있다. 첫머리에서 명제를 제시하고, 취사 선택된 영화에서 실례를 찾아 나가는 방식인데...'아...그건 이 영화에서도 그랬는데..' 하는 독자의 개입이 딱 들어 맞는다. '네...그 영화가 좋은 예이죠!' 하면서...독자, 내지는 청객이 미처 챙기지 못했던 또 다른 실례들을 친절하게 부연설명 하면서 공감대를 이뤄 나간다. 제대로 된 눈높이 교육인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면....
대사를 씀에 있어서 '상식에 대한 무지함을 이용'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하며 누구나 뻔히 알 수 있는 명제를 제시한다. '이런..방식은 코미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죠'...하는 순간...우리는 '넘버 3'의 '인터넷/인터폴' 장면을 떠 올릴 수 있다. 그랬을 때...저자는 그런 부분을 인정하면서...우디 앨런의 영화 '브로드 웨이를 쏴라'에서 무식한 마피아 보스가 연극하는 곳에 갔다가 탈의실에서 자기 애인이 다른 사람들과 햄릿 어쩌고 얘기하자 '햄릿이 어떤 놈이야'하고 자기 애인에게 따져 묻는 에피소드를 인용한다거나, 우디 앨런 또한 이 장면을 1959년 고다르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서 미셀이 애인 빠트리샤가 윌리엄 포크너 얘기를 하자 그가 유명한 소설가인지도 모르고 '그놈하고 잔거야?'하고 캐묻는데서 아이디어를 따 왔다...라고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낸다. 생생한 현장 강의라는 부제가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문화센터 시나리오 창작 강의라는 포맷에 맞춰졌던지 'A,B,C', 'A-1,A-2', 'B-1,B-2', 'C-1,C-1-1,C-1-2'.....식의 형식으로 그 서술 방식이 굳어져 버렸다는 점인데, 현실적인 눈높이 교육을 성공시켰다는 점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트집에 불과하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염소를 묶어 놀수 있는 것이다. 염소가 딱해 보이긴 하지만, 호랑이를 얻었다면 대만족인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은 문학작품이 아닌 것이다. 형식에 대한 변주 보다는 일관된 입장을, 메타포 보다는 서술을 필요로 하는 실용서인 것이다.
500페이지 가량의 얇지 않은 두께, 12000이라는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이지만..... 알듯말듯한 외국 번역서적 보다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괜찮은 시나리오 입문서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기존의 영화 읽기 서적에서, 걸러내고 가지치는 작업이 번거로왔다면 반대급부로 활용해 볼 만한 알찬 책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