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소년 곁으로 다가온 아버지가 말을 건넸다.
“애야, 태양을 조심하거라. 순식간에 네 목숨을 빼앗아간단다.”
“아이들 눈빛이 더 무서워요.”
“네가 어른이 되면 태양을 더 무서워하게 될 거다. 태양이 내뿜는 열기는 너를 순식간에 녹여서 물로 만들어버린단다.”
“아빠, 저는 태양이 무섭지 않아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소년은 태양이 무섭지 않았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꼭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는 태양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단다. 그 존재를 만나는 날이 오면 용기로 이겨내야 한다.”
아버지가 커튼을 내렸다. 집 안은 어두컴컴해지고, 창 너머로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양보다 더 무서운 존재? 그게 뭘까?’
소년은 생각했다.
‘머리에 뿔이 달린 괴물일까?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녀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소년은 태양보다 더 무서운 존재를 알 수 없었다. 태양은 괴물과 마녀를 모두 태워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 1부 중에서
고목의 나뭇가지에서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 쏟아져 나오는 날, 소년은 여름 동안 잠겨 있던 문을 활짝 열고 언덕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흰 눈으로 덮여 있는 언덕 풍경에 익숙해졌지만, 소년이 아주 어릴 때, 난생처음으로 언덕에 오른 그날, 꽂과 나비가 사라지고 흰 눈으로 덮여 있는 세상을 본 소년은 크게 실망했다. 겨울에도 꽃이 피어 있고 나비가 날아다닐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소년은 화가 나서 고목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눈송이를 만들어서 꽃을 다 덮어버린 거야?”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우주의 섭리란다.”
“우주는 어디에 있어? 지금 당장 우주를 만나야겠어!”
“우주를 만나서 어쩌려고?”
“겨울에도 꽃이 필 수 있게 해달라고 할 거야. 그럼 나비도 날아올 거야.”
“그 부탁은 우주도 들어줄 수가 없단다.”
“어째서?”
“우주는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어떤 균형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란다.”
“균형이 뭐야?”
“수십억 개의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우주를 움직이는 조종장치란다. 그 조종장치가 우주의 균형을 잡아주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거란다.”
“그렇게 많은 톱니바퀴 중에서 톱니바퀴 한 개를 바꾸면 어떻게 되는데?”
“아마도…… 수천 개의 태양이 뜨고,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될 거야. 어쩌면 땅이 갈라지고 대지가 물에 잠길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우주가 혼돈에 휩싸인단다.”
겨울에 꽃을 피우는 일 하나가 수천 개의 태양을 뜨게 하고,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우주를 혼돈에 빠트린다는 말을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쩌면 고목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감 옮겨 쌓기 놀이를 할 때도 균형을 잡지 못하면 장난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날 소년은 우주의 균형을 잡아주는 톱니바퀴 하나가 잘못되면 우주가 혼돈에 휩싸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년은 우주의 균형을 잡아주는 톱니바퀴의 비밀이 궁금해졌다.
‘우주를 움직이는 톱니바퀴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리고 누가 그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걸까? 신일까? 아니면…….’
- 1부 중에서
낯선 언덕에서 낯선 세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사람 마을을 벗어나 낯선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는 현실이 놀라운 기쁨으로 다가왔다.
‘갇혀 있는 세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기쁜 일이야.’
머릿속이 밝아졌다. 눈사람은 가슴을 활짝 펴고 새로운 공기, 새로운 향기를 음미했다. 아, 그것은 오묘한 떨림이었다.
눈사람은 앞으로 자신이 헤쳐나가야 할 미지의 겨울을 상상해보았다. 그곳은 설렘과 모험의 땅이었다.
눈사람의 마음은 겨울을 훨훨 날아 겨울의 끝으로 날아갔다. 겨울의 끝은 빛과 희망이 가득한 천국이었다.
‘어쩌면 겨울의 끝에는, 겨울을 벗어날 수 있는 비밀의 통로가 있을지도 몰라.’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자니 갑자기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도 언젠가는 겨울의 끝으로 여행을 떠날 거야.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존재를 만나고, 그들에게 깨달음을 얻어, 눈사람도 인간처럼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거야. 그럼, 우주를 움직이는 톱니바퀴의 비밀도 알 수 있겠지!’
- 2부 중에서
숲을 빠져나가는 입구에 도착했을 때 길 양쪽으로 눈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마을로 들어올 때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눈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했으며,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눈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눈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사람들이 마차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손에 몽둥이와 곡괭이를 들고 있었다.
그제야 눈사람은 마차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눈사람이 아니라 하얀 털옷을 뒤집어쓴, 마을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겁에 질린 눈사람은 황급히 마차에서 내려 숲 속으로 치달았다.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마차에 오른 인간들이 물건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 3부 중에서
어느 날, 파도는 매끈한 해수면을 들쑥날쑥하게 만들고 그곳으로 범선을 이끌었다. 눈사람은 돛대 위로 넘실대는 성난 파도를 보았고, 범선은 성난 파도를 미끄러지듯이 타고 올라가 허공을 붕붕 떠다녔다.
“성난 파도는 우리네 삶과 닮았어.”
키를 잡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모노가 혼잣말을 했다.
어느 날, 눈사람은 인간이 하나도 없는 얼음섬을 보았다.
“저곳은 물개들의 안식처랍니다.”
모노가 설명했다.
어느 날, 눈사람은 인간을 닮은 물고기들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조심하시오, 노랫소리에 홀리면 기억을 빼앗긴다오.”
이번에도 모노가 설명했다.
눈사람은 거북 한 마리가 혼자서 헤엄치는 것도 보았다.
“저놈은 고독한 여행자랍니다.”
범선보다 더 큰 물고기들이 하얀 포말을 꼬리에 달고 무리지어 움직이는 광경도 보았다.
“수염고래랍니다. 여행의 동반자죠. 선원들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소.”
하늘에서 날아온 물고기들이 갑판 위에 떨어졌다.
“바다에는 예기치 못한 행운도 있다오.”
바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모노는 철학자처럼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눈사람은 바다를 여행하는 것은 삶의 여정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노가 철학자가 된 것이리라.
- 4부 중에서
눈사람이 언덕 위에 도착했을 때 겨울 속에 서 있는 인간 하나가, 사막을 코앞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사막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폴짝 뛰어서 사막의 열기 속으로 들어가서는, 돌아서서 다시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냉기 가득한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폴짝 뛰어서 겨울로 와서는 다시 사막을 쳐다보다가 사막으로 넘어가서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 여행자는 똑같은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눈사람은 그가 겨울 속으로 왔을 때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싸우는 중이라오. 나는 물러서지 않을 거요.”
“싸우다니요? 누구하고 싸운다는 말입니까, 제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사막에는 내 영혼이 있다오.”
“당신의 영혼하고 싸우는 중이라는 말이오, 왜요?”
“내가 겨울에 있으면 사막에 있는 영혼이 나를 사막으로 오라고 호통을 친다오. 나는 열기가 이글거리는 사막이 두렵소.”
“방금 전에는 사막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갔었지요, 내가 사막으로 가면, 내 영혼은 겨울로 냉큼 건너가서는 나에게 겨울로 오라고 호통을 친다오. 하지만 나는 냉기만 있는 겨울이 두렵소. 그러니 어쩌겠소. 사막으로 가려고 하면 열기가 두렵고, 겨울로 가려고 하면 냉기가 두렵다오.”
- 5부 중에서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