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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애 1

혹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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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473쪽 | 498g | 128*188*30mm
ISBN13 9791157609444
ISBN10 1157609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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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이정운
필명 동하冬河
블로그 http://blog.naver.com/evelesseden

작가연합 시나브로 소속. 로망띠끄 에이전시 소속

낮보다 밤을 좋아하는 올빼미.
달과 초콜릿 같은 글을 쓰고 싶은 여자.

출간작

경국지색
구중궁궐 1, 2
기라 1, 2
야한夜寒이야기
제신諸神의 분노
폐하! 고정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황후廢皇后 1, 2
해연 1, 2
ASKY(안생겨요)

유료연재작

혹애(네이버 엔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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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창일 뿐이에요.”
수십 개의 마이크가 판옵티콘처럼 그녀를 둘러쌌다. 여기저기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현기증이 날 만큼 날카롭게 쏟아지는 빛의 세례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가장 빛나는 여자였다.
“아신 그룹의 주 이사님과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녀가 담담하게 선언했을 때였다. 기자 회견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우리가 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는 전력을 다해서 뛰어왔는지 지쳐 보였다. 숨을 헐떡인 그가 갑갑한 듯 미간을 찡그리고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수백 개의 카메라가 한순간에 그에게로 돌아갔다.
당연했다. 그는 재계 서열 3위인 아신 그룹 주경원 회장의 유일한 아들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한낱 여배우보다 아신의 황태자에게 몰려 있었다.
그야말로 대특종. 기자들은 무아지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기자 회견석에 앉은 채로 그녀는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러면 대단한 사이라고 말할까요?”
“우리 잤잖아. 그럼 아무 사이가 아닌 건 아니지 않나?”
그가 비죽이 웃었다. 사방에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방송사의 로고를 단 대형 TV 카메라들이 그를 타깃으로 초점을 맞췄다. 최첨단 촬영 장비들이 서슬 퍼렇게 그를 향해 아가리를 드러냈다.
어지간한 배우들도 기가 죽을 상황에서, 그는 배우도 아니면서 당당했다.
물론 얼굴이야 어지간한 배우들도 명함을 못 내밀게 생기긴 했다. 몇 년을 연예계에서 구른 그녀였지만 그보다 잘생긴 남자는 본 적 없었다.
그날도 느꼈지만, 여전히 잘난 외모였다.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그는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이 자리에는 수백 명의 이목과 카메라가 몰려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는 정녕 모르는 걸까?
아니. 모를 리 없다. 그처럼 똑똑한 남자가 모를 리 없다. 알면서 온 거다. 이 일이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줄 것임을 알면서도, 기자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왜? 당신 같은 냉철한 이성의 화신이?
“날 사랑해요?”
그녀가 물었다. 그와 그녀의 시선이 예리하게 얽혔다.
“그래.”
“웃기는 소리.”
“날 용서하지 않는 건 괜찮아. 하지만 내 진심까지 부정하지는 마.”
“못 믿겠는걸요.”
“무릎이라도 꿇을까?”
그가 시니컬하게 되물었다. 그녀는 냉소했다.
“그 정도로 되겠어요? 주 이사님이 제게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가 정장 윗도리를 벗어서 옆 사람에게 건네주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최고급 정장이 수백, 수천 명의 구둣발이 지나간 자리에 닿았다.
아신의 황태자가 무릎을 꿇었다.
기자 회견장에 찰나 정적이 내려앉았다. 뒤늦게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졌다. 기자들은 전율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대사건이다!
그녀는 천천히 기자 회견석에서 일어났다.
백자 같은 피부와 길고 사늘한 눈매. 반듯한 이마. 흠잡을 데 없는 코. 면면이 따져 보면 그는 장인이 공들여 조각한 듯 반듯하다. 그러고도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신은 그에게 아신이라는 배경과 비상한 두뇌, 그리고 냉혹한 심장을 주었다.
그는 그녀가 아는 가장 완벽한 남자였다. 그만큼 자존심도 하늘을 찔렀다. 결단코 이런 곳에서, 만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가 그에게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와 조금 거리를 두고 그녀는 멈춰 섰다.
그가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타는 듯이 뜨거운 시선이었다. 야수 같은 눈동자.
“나를 사랑하라고는 하지 않겠어.”
그가 모든 것을 내던졌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녀 때문에.
“내 옆에 있기만 해. 유재이.”
유재이. 오래간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전신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그녀는 기뻤다. 너무 기뻐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그녀는 그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 나를 사랑해 줘서.”
그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나직이 덧붙였다.
“내가 이렇게 완벽한 복수를 하게 해 줘서.”
그리고 그녀는 그를 지나쳤다. 그대로 기자 회견장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무릎을 꿇은 아신의 황태자와 그를 버린 여배우 한재이.
“희대의 스캔들이야!”
누군가 흥분해서 외쳤다. 기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그에게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고 초근접 거리에서 사진을 촬영해 대기 시작했다.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사님에게서 떨어지십시오!”
갑자기 나타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그를 보호하듯이 빙 둘러쌌다.
“만약 오늘 일을 한 줄이라도 기사화하는 곳이 있으면 아신 그룹의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TV 카메라 안 꺼요? 공중파에 뿌린 우리 계열사 광고를 모조리 회수한 뒤에 정신 차릴 겁니까?”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지 마시죠! 헌법 제21조 1항에도 나와 있는 명백한 권리입니다.”
“대기업이면 다야?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지 마라!”
막으려는 자들과 폭로하려는 자들이 부딪쳤다. 그들은 각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몸싸움도 불사했다. 기자 회견장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기자 회견장 폐쇄하고, 기자들에게서 카메라하고 노트북, 휴대 전화, 녹음기 등 전자기기 모조리 빼앗아. 1팀은 당장 메이저 언론사의 사장, 국장급 인물들에게 다 전화 돌려. 마이너 언론사는 따로 자리 마련해서 해결해!”
이어 마이크로 지시를 내린 김 비서는 이어 셋을 빼고 자신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이사님.”
그때까지도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없이 있었다. 넋이 나간 듯 초점이 없는 눈동자. 김 비서는 순간 덮쳐 오는 불길한 예감에 그의 어깨를 잡았다.
“주 이사님. 주신우 이사님.”
김 비서의 불안과 달리 그는 정신이 나간 건 아니었다. 김 비서의 부름도, 귀가 뜯겨 나갈 듯한 아수라장의 소음도 그가 먼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15년 전, 그가 열일곱 살이었던 시절로.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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