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나무를 대상으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보자. 두 사람이 그린 나무 그림은 똑같을까? 똑같지는 않다, 아니 똑같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두 사람의 관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느낌을 갖고 있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들도 다르며, 그에 따른 선과 색과 형태와 명암 등으로 이룬 형식적 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가 집이나 동물같이 전혀 다른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처럼 한 장의 그림에는 대상에 의해서 결정되는 측면이 있고, 그리는 사람에 의해서 달라지는 측면도 있으며, 결과물인 그림 자체의 형식적 측면도 있다. 모방적 속성과 표현적 속성과 형식적 속성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이 세 가지는 예술 창작의 서로 다른 관점이 되기도 하고, 감상과 평가를 위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보고 강조하느냐의 차이에 따라 그림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재현 미술이 모방적 속성과 표현적 속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비재현 미술로도 불리는 추상 미술은 형식적 속성을 보다 더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감상에 있어서도 어느 것에 초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 작품의 이해가 달라진다. 무엇을 그렸는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어떤 형식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지 중에서 무엇을 주목하느냐에 따라 그림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시대에는 대상을, 다른 어떤 시대에는 예술가를, 또 다른 어떤 시대에는 작품 자체의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관점의 차이에 의해서 모방론, 표현론, 형식론 등의 세 가지 예술론들이 이어져 왔다.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예술의 정의가 달라졌고, 그에 따른 미술 작품들의 이해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책을 시작하며’」중에서
예술의 창작과 감상을 명석하고 판명한 원리로 묶어 두려 한 합리론적 미학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작품의 실제적인 창작과 감상에서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예술의 실제적인 경험을 강조한 경험론적 미학도 취미 판단에서 보편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한계를 나타냈다. 취미를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성향의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흄은 취미를 자극하는 공통적인 성질은 없으며, 특정한 취미 판단이 정당하다든지 보편성을 갖는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이 대상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에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이런 문제점과 한계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했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비판적 종합으로 자신의 철학을 세우고, 지금까지 등장한 감성, 상상력, 오성, 이성 등의 마음의 능력을 체계화하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칸트는 합리론이 지식의 보편 타당성을 이루었지만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드러냈고, 경험론에 의한 지식은 현실에는 부합하지만 보편 타당성을 이루지 못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보편 타당성과 현실에 부합하는 지식을 위해서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학의 전성기를 이룬 독일 관념론’」중에서
이런 관점에서 리오타르는 이제 미술 작품들은 전체성과 보편성에 대한 동경이나 관념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의 조화와 같은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전체성과 보편성에 대해 투쟁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차별성을 활성화해야 하며, 다원주의를 넘어 해체주의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미술 작품들이 전체성과 보편성에 사로잡혀 개별적인 작품들의 차별성과 이질성에 근거한 예술적 가치들을 말살해 왔다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작품들은 그 가치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해체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지식이 위기에 처했고 보편성의 파산을 겪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미술 작품들에도 이렇게 적용하고 있다.(……)
앞으로의 미술은 어떻게 가야할까? 필자는 리오타르가 제시한 길이 미술의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해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 차별성과 이질성이 강조된다고 해서 그것만이 미술 작품의 전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리오타르의 주장처럼 보편성을 거부하고 차이성과 이질성의 가치를 강조하는 시도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이 미술 작품의 특성들 중 하나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미술 작품들이 여전히 ‘우리’를 대상으로 해서 우리 앞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공감을 구하려 한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미술이 추구해 온 보편성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에 호소하는 최소한의 보편성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미술 작품들에서 합의의 내용이나 형식이 무엇인지를 특정할 수는 없다. 각각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각자가 찾아야만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어떤 보편성을 향한 ‘우리’를 전제하지 않는 예술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오타르의 주장에서는 그 어떤 보편성을 향한 ‘우리’의 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책을 마치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