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진주성 이야기

진주성 이야기

: 기록유산으로 되살린 역사 공간

진주문화를 찾아서-17이동
김준형 | 알마 | 2015년 02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 판매지수 126
베스트
역사 top100 1주
정가
10,000
판매가
9,000 (10% 할인)
배송안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1(여의도동, 일신빌딩)
지역변경
  • 배송비 : 유료 (도서 15,000원 이상 무료) ?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  해외배송 가능
  •  최저가 보상
  •  문화비소득공제 신청가능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2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180쪽 | 276g | 140*190*9mm
ISBN13 9791185430485
ISBN10 118543048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김준형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를 나와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 분야는 한국사회사이며 조선 후기 이후 향촌사회의 변화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 《조선 후기 단성 사족층 연구》 《1862년 진주농민항쟁》 《진주 연계재 연혁》 《근대사회변동과 양반》(공저) 《입산마을의 역사와 문화》(공저) 들이 있고, 옮긴 책으로 《진폐록陳弊錄》이 있다. 진주성 연구에도 힘써, 관련 논문으로 [조선시대 진주성의 규모와 모양의 변화](《역사와 경계》 86), [조선시대 진주성의 기능과 성내 시설의 변화](《조선시대사학보》 65), [조선 후기 진주성도의 비교분석](《조선시대사학보》 68) 들이 있다.
2013년에는 경상대학교 박물관장으로서 전국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는 [진주성도]와 고지도 자료를 모아 ‘진주, 진주성’이라는 주제로 진주시청과 경상대학교 도서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머리말|진주성으로 들어서며
진주성은 지형적으로 적을 방어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조선 후기에 와서는 경상우도의 군사를 총괄하는 우병영이 설치되기도 했다. 우병사를 정점으로 하는 경상우도의 군사 조직이 진주성 안에 들어와 있었고, 이를 위한 여러 관아 건물들도 진주성 내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장관을 이루었다. 게다가 남강을 끼고 있는 진주성 주위는 풍경이 매우 뛰어났다. 많은 사람이 진주성을 찾아와 노닐었고, 주위 풍경을 노래하는 글을 남겼다. 이뿐 아니라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여러 종류의 [진주성도晉州城圖]가 현재까지 많이 발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_12쪽

조선 초기의 진주성이나 임진왜란 때의 진주성은 지금의 진주성과는 모습이 전혀 달랐다. 조선 후기 우병영이 들어섰던 진주성도 지금과는 달랐다. 따라서 각 시기마다 달라졌던 진주성의 모습은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어야 당시 진주성 내의 건물이나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의 모습을 올바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모은 여러 가지 자료와 그림들을 통해 시기에 따라 진주성의 전체 모습과 그 안에 들어선 건물의 모습이 달라져간 것을 살펴보려 한다. 이 작업이 진주성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을 올바로 그려보는 데 든든한 바탕이 되기를 바란다. _14쪽

1장 역사와 함께 변화해온 진주성의 모습
고려 말기 이후 진주성의 역할
성을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방어 활동이 있었다면 그런 사실이 구전口傳으로라도 전해졌을 터인데, 전하는 바가 별달리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중요한 사건은 없었던 모양이다. 1377년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허물어졌다고 전해지듯, 고려 말 이전까지의 진주성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 아니라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었고, 중요한 방어거점 역할은 못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왜구들의 활동이 빈번해지면서 진주성을 쌓는 것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17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진양지晋陽誌》에 의하면, 1360년(공민왕 9) 이후로 왜구들은 진주 인근의 사천?고성현이나 진주의 속현인 악양?명진?영선?반성?진해현 등을 빈번하게 공격해왔고, 나중에는 진주 관아까지도 공격해왔다. 특히 1380년에는 진주성 안에 있던 촉석루가 왜구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을 정도였다.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조정에서 원수 이림李琳이나 도순문사道巡問使 배극렴(裴克廉, 1355~1392) 등을 파견하면서, 진주에 확고한 방어 거점을 확보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_25쪽

조선 초기 진주성의 모습
하륜 당대의 진주성은 현재의 진주성보다 규모가 약간 확장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모습은 어떠했을까? 현재의 진
주성에서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곳은 조선 후기 내성에 해당했던 동쪽 및 동북쪽 부분이다.
진주성은 남쪽이 남강과 접하는 절벽이고 서쪽과 북서쪽도 마찬가지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런 지형 자체가 방어하기 좋은 조건이 되었다. 이 방면에서는 바깥쪽으로 성벽을 확장하기가 적절하지 않다. 반면에 동쪽과 동북쪽의 조선 후기 내성에 해당하는 곳(현재 북장대 근처에서 촉석문에 이르는 선)은 경사가 급한 언덕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완만하거나 높이가 낮아 평지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동북쪽 내성이 있는 부분에서는 바깥쪽으로 성벽을 확장해서 쌓아도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_31~33쪽

임진왜란 시기 진주성의 변화
진주성의 모습은 임진왜란 직전에 크게 변했다. 1591년 경상도 관찰사이던 김수 金?가 진주성이 좁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성을 동쪽으로 길게 확장해서 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쪽의 낮은 진흙땅에까지 성을 확장한 탓에 오히려 성벽이 탄탄하지 못해 무너지기 쉽고, 주변보다 낮은 곳에 동서로 길게 늘여져 적이 높은 위치에서 공격할 여지를 준다는 문제가 생겼다. _37~38쪽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때의 상황을 알려주는 《선조실록》 기사에는 6월 27일 초경(初更, 오후 7시~9시)에 왜적이 신북문을 재차 침범하자 김해 부사 이종인 등이 힘을 다해 격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임진왜란 때 신북문이 새로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신북문이란 명칭과 대비되는 구북문舊北門도 이때 등장한다.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던 10월 10일, “왜병 1만여 명이 어두움을 틈타 몰래 이동하여 갑자기 구북문 밖에 이르렀다”라고 하는 기사의 구북문이 그것이다. 이 구북문은 조선 초기 진주성의 북문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성이 동서로 길게 늘어나면서 새로운 북문을 동쪽에 다시 세울 필요성이 있었고, 이에 따라 원래의 북문은 구북문이라 부르게 된 것 같다. _43쪽

임진왜란 이후 진주성의 개축과 변화
임진왜란 직후 경상도 우병영이 창원에서 진주로 옮겨오면서 진주성의 모습은 다시 변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창원의 우병영(합포영合浦營) 성은 황폐화되어 형체가 없어졌는데, 진주성이 그 형세가 험하여 방어하기가 좋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우병영을 진주로 옮기게 된 것이다. 1602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하 병사로 약칭) 이빈李?이 진주성 일대의 지형을 그린 〈촉석지형도화 矗石地形圖畵〉를 담은 장계를 올렸고, 1603년에는 우병사로 부임한 이수일李守一이 병영을 진주로 옮기고 진주 목사를 겸하게 되었다. _44쪽


2장 진주성이 품었던 많은 건물들
조선 전기와 임진왜란 시기 진주성 안의 시설
조선 전기 진주성에 있었던 시설을 좀더 알아보려면,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진양지》를 참고해야 한다. 《진양지》에 의하면, 청심헌 북쪽 대문 위의 봉우리에 인월당 引月堂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이 밖에 쌍청당 북쪽에 군기고가 있었고, 관갈지官碣旨에 수창 ?倉}이 있었다.
그런데 수창은 앞에서 언급했던 군창과는 성격이 달랐다. 군창은 유사시를 대비해 군사용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반면에 수창은 《진양지》의 해당 기록에 저동猪洞?금산琴山?대곡大谷 등 20여 개 소속 리(里, 면面과 같음)가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진주 고을 주민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환곡 還穀용 곡식 보관 창고로 별도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환곡은 해마다 봄철에 백성들이 끼니용 곡식과 농사용 종자가 부족하여 겪는 곤란을 덜어주기 위해 관아에서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곡식을 나눠주고 가을 수확기에 거두어들이는 제도였다. _55~56쪽

17세기 진주성 안의 시설
진주성이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되면서 병영과 관련된 건물은 내성에 집중되었다. 반면에 외성은 주로 민간이 거주하는 공간이 되었다. 우선 《진양지》를 통해 병영이 들어선 직후인 17세기 초의 진주성 내 시설들을 살펴보자.
이때는 우병사가 진주 목사를 겸하고 있었다는 특수 상황을 전제로 해야 한다. 1603년 병사 이수일이 우병영을 진주로 옮기면서 진주 목사를 겸하게 되었고, 이런 겸임 체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영남에서도 학술과 풍속이 잘 갖추어진 고을인 진주를 병영의 군사적 업무를 맡는 무관이 다스리면 유교적 학풍이 침체된다는 주민의 호소로 말미암아, 1635년에 다시 목사가 파견되어 우병영과 진주목의 책임자도 분리되었다. _61~62쪽

18세기 진주성 안의 시설
지방의 감영과 병영 예하의 군사 종류와 수가 증가하면서, 이와 관련된 독자적인 기구가 만들어지고 그 청사도 새로 들어섰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무력함이 드러났던 조선 전기의 군사제도인 5위제五衛制는 완전히 무너지고, 그 대신 중앙군은 훈련도감 訓鍊都監을 비롯한 5군영 체제로 새롭게 구성되었다. 지방에도 속오군束伍軍 체제가 형성되어 조선 후기 군사제도의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전의 5위에 속해 있던 기병과 보병 등의 군사는 병조로 귀속되었고, 이들은 번을 서는 일부 기병을 제외하고는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에 따라 포를 바쳐야 했다. 번을 서는 군사와 포를 납부하는 군사를 합하면 수가 두 배가량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양역良役 편성에 원칙과 체계가 없어서, 복잡하고 다양한 명목의 군역이 새로 설정되고 군사 수가 상당히 불어나게 되었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에 의하면, 조선왕조 군사제도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것을 구제舊制라 하고 임진왜란 이후에 첨가해서 설치된 제도는 신제新制라 불렀는데, 이 신제에는 잡다하게 설정된 명색이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 없었다고 한다. 지방의 감영과 병영에는 이 현상이 더욱 심했다. 실제로 진주의 경상우병영에 소속된 군사 종류와 수도 상당했다. _66~67쪽

19세기 진주성 안의 시설
19세기에 와서도 공공 건물들은 더욱더 늘어났다. 이것은 19세기에 만들어진 18종의 [진주성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진주성 내외의 건물 이름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 소장된 10폭 병풍도(1841년 이후 제작)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이 그림을 통해 진주성의 건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78쪽 그림 참조).
이 [진주성도]에 나타난 건물들을 《여지도서》 《촉영지》의 시설과 비교해 정리해보면, 79쪽 표4와 같이 시설이 전반적으로 늘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건물 이름도 변하고, 군사 기구 및 아전과 관련된 공해와 창고 시설이 적지 않게 늘어났다. 병사가 일을 처리하는 동헌인 관덕당이 19세기 [진주성도]에서는 ‘운주헌運\籌軒’이라 기록되어 있고, 우후의 동헌인 주면당은 [진주성도]에서 ‘중영’ 또는 ‘망일헌望日軒’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 병사의 비장들의 처소인 비장청도 [진주성도]에서는 ‘백화당百和堂’이나 ‘막부幕府’라고 표기되어 있다. _77쪽

진주성 안의 중요 시설과 그 변화
함옥헌은 촉석루에서 노닐던 사신이나 빈객들이 쉬며 잠잘 곳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다른 부속 건물도 아마 이런 용도로 쓰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런 건물들은 촉석루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송병선宋秉璿의 ‘단진제명승기丹晉諸名勝記’에 “동쪽에 함옥정涵玉亭이 있는데, 촉석루와 처마가 이어져 있었다”라고 하는 것이나 오횡묵吳宖默의 《경상도함안군 총쇄록慶尙道咸安郡叢?錄》에 “동쪽에 촉석루와 지붕이 이어진 작은 집이 있는데, 함옥헌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라고 하는 것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촉석루와 함옥헌은 아마 마루를 통해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촉석루에서 노닐다가 피곤해지거나 밤이 되면 함옥헌에 있는 방에 들어가 쉬곤 했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촉석루와 부속 건물들은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를 겪으면서 불타버렸다. 한동안 이 건물들은 복구되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임진왜란 후 우병영이 진주성 내에 배치되면서 당시 병사로 부임한 이수일에 의해 성과 병영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세워지고 촉석루의 부속 건물이던 청심헌도 다시 세워졌지만, 촉석루를 비롯한 나머지 건물은 지어지지 못했다. 아마 병영과 관련된 많은 건물을 지어야 하는 상황에서 규모가 큰 촉석루의 중건 비용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_95~97쪽

3장 〈진주성도〉가 전하는 진주성의 옛 모습
다채로운 회화지도 〈진주성도〉들
[진주성도]마다 진주성의 전체 모습을 비롯하여 각 건물의 존재 여부 및 모양이나 위치가 다른 경우가 많고, 건물의 명칭도 서로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차이는 제작자의 회화 기법이나 치밀도의 차이에 따라 나타날 수도 있고, [진주성도]가 제작된 시기에 따라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_134쪽
[진주성도]가 그려진 시기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부 건물이 다른 모습으로 중건되거나 소멸되고, 다른 곳으로 옮겨 세워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건물 명칭이 달라진 것이 그림에 반영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런 차이를 토대로 여러 [진주성도]의 제작 시기나 그 순서도 추정해볼 수 있다.
현재 여러 [진주성도] 중 제작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액자형 그림뿐이다. 이 그림 왼쪽 아래에는 ‘병오 2월 ?일 진주성지도’라는 기록과 수결(手決, 도장 대신에 자필로 자신의 이름이나 기호를 표시한 것)이 있고, 남문 누각이 2층, 신·구북문이 1층으로 묘사되어 있다. 1780년대 후반까지 남문이 1층이었고 1894년에는 서문·촉석문 외에 모두 2층으로 바뀐 것을 전제로 하면, 이 그림은 184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_135쪽

조선 후기 회화지도들은 공간과 시점 설정에서부터 개별 산세의 표현까지 묘산도墓山圖 형식의 산형도山形圖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묘산도는 묘소를 화면 중앙에 배치하고 상하좌우 각 방향으로 산봉우리를 눕힌 듯이 그리는 개화식(開花式, 꽃이 사방으로 퍼져 핀 모양으로 그리는 양식) 구성 방식(사방시점)을 쓴다. 이런 묘산도 형식은 조선시대 지도 제작의 밑그림이 되어, 조선 후기에 서울의 지도인 도성도나 평양·개성·전주·진주 등의 도시 전경을 그린 지도 및 일반 군현지도는 흔히 묘산도 형식을 빌렸다. 관아나 성과 같은 특정 공간을 중심에 두고 원형 구도로 그리곤 했던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18세기 중반 《해동지도》에 실린 군현지도들과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영남지도》와 《전라남북도여지도》 《해서승람》 《호서전도》 등의 채색 필사본 회화지도에도 사방시점과 함께 일방시점 혹은 삼방시점에 의한 산악 구성법이 혼합하여 나타난다. _139쪽

〈진주성도〉에 기록된 진주성과 그 주변
여러 [진주성도]에 의하면, 진주성과 진주 읍치 부근(구 시가지)에는 독자적인 관아가 여럿 들어서 있었다. 진주 고을을 다스리는 진주 목사 관아와 경상우병사 관아, 진주진 영장 관아가 그것이었다.
이 가운데 우병영은 경상우도 28개 고을의 병마를 총괄하는 곳으로, 병사 동헌 및 그 부속 기관들이 모두 진주성 내성에 밀집해 있었다. 진주진 영장은 경상우도 산하에 있는3 개 진의 영장 중 하나로 ‘우영장 右營將’이라고도 했다. 각 고을에 편성된 속오군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각 도를 몇 개의 진관 鎭管으로 나누어 구역마다 속오군 조련을 감독하는 영장을 두는 제도는 조선 후기 인조와 효종 대에 정비된 것이다. 이는 속오군의 조련을 해당 고을에만 맡겨두지 않고 영장이 정기적으로 각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점검하고 무예를 시험하는 제도였다. 진주진 영장은 진주를 포함한 14개 고을의 속오군 훈련을 감독하고 훈련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_143~144쪽

당시에는 수운이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진주성도] 속에는 사람들이 배로 남강을 건너는 모습, 뱃놀이하는 모습, 항아리나 땔감을 실어 나르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남문 아래 강변에서 배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갖가지 형태의 배들이 남강을 떠다니고, 강변에는 갑판 위에 정자를 갖춘 정자선亭子船이 정박한 모습도 그려져 있다. 1639년에 진주 목사로 부임한 이소한 李昭漢은 부임한 이듬해에 한동안 운영되지 않았던 정자선을 다시 만들어 운영했다고 한다. 진주에 들른 관리나 유람자 들이 수령과 함께 배를 타고 남강 유람을 즐기던 모습은 여러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_147쪽

진주성 주변으로 바둑판처럼 펼쳐진 논밭에서 무리를 지어 농사짓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작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 대부분 전통 복장인 흰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으며, 햇빛을 가리려고 모자를 쓴 사람도 더러 보인다. 크기가 작아 사람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소매와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허리를 구부려 일하는 모습은 마치 구슬땀이 맺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여러 〈진주성도〉 가운데 부산시립박물관의 것에는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가는 모습도 담겨 이채롭다. [진주성도] 그림 곳곳을 들여다보면 농사짓는 사람들 속에 새참을 가져다 나르는 듯한 여인네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_149~150쪽

4장 근현대 진주성의 변화와 남은 이야기
구한말 진주성의 변화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친일 개화파 정권이 무너지고 나자,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고려함)’이라는 취지 아래 1896년 8월 4일에 다시 23부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로 개편했다. 이때 비로소 ‘경상남도’라는 행정구역이 생겨났고, 경상남도는 1부 29군을 소관하게 된다.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154~155쪽

경상도 우병영이 사라짐에 따라 진주성 안에 있던 우병영 관아도 진주부 관찰사의 관아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6년 13도제에 의해 경상남도가 새로 설정되자, 다시 경상남도 관찰사의 관아로 바뀌었다. 그동안 우병영에 소속되었던 여러 기구나 건물도 감영 체제의 것으로 바뀌거나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을 것이다.
예컨대 1906년 관찰사 관할하에 경찰 업무를 전담하는 경무서警務署를 두었는데, 이 건물은 공북문 내 오른쪽 진무청鎭撫廳과 배리청陪吏廳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또 1904년에는 부산감옥釜山監獄 진주분감晉州分監이 남쪽으로 남강의 절벽 부근, 만경산 가운데 움푹 들어간 곳에 세워졌다. 그곳은 이전에 관찰사 예하의 아전의 집무소가 있던 장소다. -156~157쪽

일제강점기 진주성의 훼손과 변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1905년 이후에는 건물이나 시설이 옛날과는 크게 달라지고 진주성도 점차 훼손되기 시작했다. 근대적 변화의 추세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화이기도 했지만, 그 배경에는 일제의 행정 편의와 전통 말살이라는 의도도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근대적 변화에 따른 진주 옛 시가지의 정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전에는 적을 방어하는 중요 기지 역할을 하던 성이 이젠 별 효용이 없게 된 것이다. 또 차량이나 우마, 사람들의 빈번한 통행을 위해 도로가 새로 확대되고 정비되어야 했다. 이런 정비를 위해서는 평지에 있는 진주성 외성의 성벽이나 그 기초가 되는 둔덕을 없애야 했다. 이런 이유로 성벽뿐 아니라 성벽을 따라 흙으로 다진 둔덕도 다 깎아버려 외성은 그 흔적조차 남지 않고 거의 사라졌다. _158~159쪽

황현은 당시에 왜인들이 진주성을 허물고 그 돌을 운반하여 집을 짓는 데 사용했다고 했는데, 이런 일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들도 앞다투어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현재 복원된 진주성의 내성 부분은 대부분 평지에 있지 않고 낮은 구릉을 따라 조성된 덕에 그 흔적이 남을 수 있었다. 다만 성벽을 쌓았던 돌들은 대부분 민가에서 가져가 건축 자재 등 다른 용도로 써버렸기 때문에 거의 사라졌다. 또 성벽 둔덕 부근까지 민가가 들어서서 그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부분도 있다. _160쪽

해방 이후 진주성 복원과 남은 문제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던 진주성은 해방 이후에 와서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던 촉석루가 1960년에 먼저 복원되었고, 1969년부터는 제1차 진주성 복원·정화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경남일보》에 의하면 그 이전에는 진주지역 차원에서 부분적 복원이 진행되어오다가 1969년에 국가적 차원에서 진주성지를 성역화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 왜적을 물리친 진주대첩으로 전국에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그 이듬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병사와 주민 6만여 명이 장렬하게 순절했던 역사적 성지이므로, 이를 성역화하여 후세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취지였다. _168~169쪽

옛날 외성의 성벽 전체를 복원하는 것은 지금은 불가능하다. 그 자리에 중요한 도로가 지나거나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외성 성벽 일부만 복원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이에 앞서 기회 있을 때마다 발굴하거나 연구자들에게 치밀한 추정 작업을 하게 해서 외성이 지나던 곳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옛 성벽 자리에서 중요한 부분을 현재의 도로나 건물에 표시할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외성의 중요 지점인 성문 등은 복원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중 남문과 신북문은 현재 큰 도로와 겹쳐 있기 때문에 되살리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동문과 이를 둘러쌌던 옹성 그리고 조선 후기에 와서 새로 건축된 동장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장차 언젠가는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_172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0건) 회원리뷰 이동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한줄평 이동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2,500원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9,00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