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그램은 새털처럼 가벼운 무게지만, 그것이 사람의 영혼이라면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무거운 것이 된다.”
영화 속의 잭은 평생을 감옥에 들락거리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그 후로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르게 사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잭 같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잭의 신앙은 배신감과 분노, 죄책감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결국 잭은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려다가 실패하고, 폴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여기서 잭이 지니고 있는 죄책감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21그램 정도 될까요?
폴은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심장을 이식받고 살아났고, 자기 몸속에서 끊임없이 뛰고 있는 심장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심장 주인의 아내인 크리스티나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잭을 죽이려 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폴의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21그램 정도 될까요?
크리스티나는 약물 중독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빠져나와 사랑하는 남편, 딸들과 행복하게 살다가 잭이 일으킨 사고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심장을 가슴에 안고 있는 폴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의 가정을 파괴한 잭에 대하여 복수심을 불태웁니다. 이러한 크리스티나의 증오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21그램 정도 될까요?
죄책감, 사랑, 분노는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서로 관련되고 엮이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서로 상관없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이 실제 삶에서 서로 맞물리고 엮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죄책감이 새털처럼 가볍습니다. 또한 사랑과 미움도 가볍게 다루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것들이 천 근 납덩어리보다 무겁게 우리 삶을 짓누르기도 합니다.
저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여러 번 읽으면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21그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모두 똑같이 영혼의 무게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21그램은 새털처럼 가벼운 무게이지만, 그것이 사람의 영혼이라면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무거운 것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 21그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 미움, 죄책감 등은 모두 영혼이 관련된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랑과 미움과 죄책감은 모두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네 영혼에는 이 모든 것들이 얽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21그램」: 영혼의 무게」 중에서
용서받았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신애는 스스로 보이는 것도 믿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갑작스럽게 보이지도 않는 것을 믿게 되는 일은 (물론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쳐야 할 어떤 과정을 생략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아들을 잃은 신애가 하늘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 했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비약’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땅에서의 고통을 전적으로 하늘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시도를 신앙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신앙은 영화 속의 신애와 같은 경험을 반복할 가능성이 큽니다. 땅에서 겪는 고통의 문제는 하늘에서만 풀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땅에서도 풀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의미에서 신애가 자기를 도와주려 하고, 늘 자기 곁에 있는 종찬의 존재를 무시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종찬은 신애가 겪고 있는 땅에서의 고통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을 위로해 줄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영화 「밀양」의 미덕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신애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 준 사람을 가시적으로 용서하려 했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신애의 행위를 그럴 필요가 없는 지나친 행위로 보거나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행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그 용서가 죄 지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데 있겠지요.
영화는 하늘의 찬란한 햇살을 보여 주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저분한 마당 한 구석에 햇살이 비추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 중간에 나오는 한 장면이 제게는 의미 있어 보였습니다. 약국 주인이 신애에게 전도하면서 약국 창문으로 비춰 드는 한 줄기 햇살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신애는 그것은 그저 햇살일 뿐이라면서 약국 주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밀양에 내려올 때 하늘에서 봤던 햇살은 밀양에서의 사건을 겪으면서 창밖에서 비추는 햇살이 되고, 마지막에는 지저분한 마당 한 구석을 비추는 햇살로 변해 갑니다. 사람의 시선 위에서 비추던 햇살이 시선과 마주보는 곳에서 만나고, 종국에는 시선 밑에서 머뭅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러한 궤적을 그리지 않나 싶습니다. --- 「「밀양」: 비밀스런 빛」 중에서
“아직 무엇을 이루지 않았을지라도 믿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신뢰요 신앙입니다.”
영화 「다우트」에서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는 몇 가지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신앙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무조건 믿으라며 ‘윽박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 성령과 성경, 심지어 교회에서는 목사와 신부가 하는 말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의심은 신앙생활에 가장 큰 적이요 악마의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고, 신앙의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권위 있는 전통과 교리라고 해도 그것을 무조건 믿고 따르는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은 상식과 양식, 개인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책임을 중시하며, 그런 것들이 전제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전통주의자들이 아무리 “아, 옛날이여!”라고 외쳐도 세상은 계몽주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금은 묻지 말고 모든 것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주장이 옳지 않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믿기 전에 먼저 잘 생각해 보고, 정말 그런지를 세심하게 따져 본 다음에 믿어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믿는다면 믿음의 내용과 믿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무조건 믿지 말고 때로는 의심도 해 봐야 합니다. 생각을 하면서 믿자는 이야기입니다. 자명해 보이더라도 때로는 의심해 보고,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리저리 따져도 보고, 생각과 성찰도 해 보고, 의심도 해 본 다음에 믿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났을까요? 생각과 의심, 성찰의 과정을 거쳤으면 그 다음에는 확실해졌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가 한 선택과 믿음에 대한 의심이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화 「다우트」는 바로 이러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다우트Doubt」: 의심 또는 회의懷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