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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청년

현대의 청년

문길상 | 은혜미디어 | 2000년 10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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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69쪽 | 272g | 148*210*20mm
ISBN13 9788981950439
ISBN10 898195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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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문길상
경남 창원군 대산면 출생. 마산고, 경북대, 경남대 졸업. 미국 Wisconsin, Hawaii 대학원 졸업. 고등학교, 대학교 30수년 교직, 퇴임. London City Univ 객원 교수. 영어영문학회 종신회원. 국제 P.E.N 회원.

저서로 수상집『원점으로 가는 마음』, 창작집『예정과 완결 사이』, 산문집『훈훈한 사랑이 그립다』와『더불어 사는 세상 다함께 웃는 지혜』『우리의 어려운 나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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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겨울이었다고 기억한다. 어느 날 난데없이 모 연구소에 다닌다는 한 청년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드릴 말씀이 있으니 찾아가 뵈도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전혀 일면식도 없는 청년이었다. 나는 마침 외국으로 떠날 준비로 마음이 쫓기고 있었던 때라 일단은 거절을 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전화로써도 알아차릴만큼 간절한 목소리로,「제 인생의 성패가 달린 중요한 일... 저, 결혼 문제입니다만...」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승낙을 하고 말았다. 다음 날 우리집 현관에 나타난 청년은 보기에도 근골이 늠름한 귀공자였다. 여유 있는 집안에서 성장한 듯 태도가 주눅들지 않고 예의 바르고, 하는 말도 군더더기 없이 명쾌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일류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재벌회사의 연구소에서 주임 연구관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청년에게는 벌써 일년 전부터 입술을 허락한 연인이 있었다. 상대는「상아(象牙)처럼 산산하고 윤기 있는 지성과 피부를 가진 처녀」라는 것이 그의 묘사였다. 이 처녀가 이상하게도 한두 달 전부터 자기를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실은 그런 징후는 이미 반년 전부터 나타났다는 것이다. 청년은 처녀가 속마음으로 다른 남자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 불안하고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떠름한 기색을 나타내는 처녀를 억지로 불러내어, 자주 같이 갔던 커피숍에 앉아서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처녀는 청년의 의심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그렇다면 요즘 들어 나를 피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는 질문에는 좀처럼 응답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든 내가 싫어진 것은 사실이지요? 솔직한 말을 듣고 싶습니다.」청년은 자포자기의 심경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망설이는 듯 하던 처녀가 이윽고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댁을 만나면 어쩐지 거북하고 부담스러울 때가 많아요... 매사에 모르는 것이 없고, 너무 자신만만해서...」청년은 이 말을 듣고 아연실색해서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되돌아 와서 혼자 곰곰 생각해 보고, 처녀의 취향이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전에 두 사람이 나누었던 대화 가운데서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의 소설『처녀지』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왔고, 처녀가 그 주인공 네지타노프와 같은 인간형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공교롭게도 청년은 소설 따위 문예물은 좋아하지 않았고 읽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이 기묘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 전연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준순(浚巡)했지만 결국 그 책을 구해서 읽어봤다. 그러나 그는 네지타노프라는 인물의「상처 입기 쉬운 신경, 박약한 의지, 문예취향, 회의가 많고 실천력은 부족한 성격」에 대해서 호감이 가기는 커녕 오히려 따분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처녀가 이 인물의 어디에 마음이 끌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청년은 말했다.「저는 구시대적인 교양의, 그 낭만적인 영탄(詠嘆)이나 감상(感傷)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공연한 인생의 낭비가 아닌가요. 현대는 과학 기술시대가 아닙니까. 과학 기술만이 우리에게 자유와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해 준다고 믿습니다. 저는 천재는 아닙니다만 일류대학을 나왔고 포부도 나름대로 가지고 지금의 연구소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출세하겠다는 야심도 있고요.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결혼할 결심으로 미래에 대한 설계도 세워 놓았습니다. 부모님이 약속한 45평 아파트에서 아들딸 하나씩 낳고 이상적인 가정생활을 즐기겠다고 말입니다. 뭐가 부족한 점이 있습니까. 저는 자신이 몸도 마음도 아주 건강하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네요. 듣고 보니 김 선생은 현대 청년으로서 이상적이네요.」나는 얼마간 우울한 마음이 되면서 이렇게 답을 했다.「그런데도 저를 보고 회의(懷疑)가 없다느니 자의식 과잉이라느니 하는 말들을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힙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그 여자와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이 상담이 나에게는 적지 않게 곤혹스러웠다. 처녀가 옛날 내가 아끼던 제자라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선생님 이야기는 자주 들었습니다. 소설 '처녀지'를 읽게 된 것도 선생님의 영향이라고 하던데요. 그렇찮아도 둘이서 꼭 찾아뵈려고 했습니다.」고 그 청년이 덧붙여 설명을 했다. 속마음을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청년과 마주 앉아 그 한 점 그림자도 없는 표정을 지켜보고, 그 명쾌하고 자신(自信)에 넘치는 음성을 듣고 있는 동안에 어쩐지 처녀가 이 사람을 피하려는 심정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앞뒤가 너무 밝은「우등생」이었다.「밝다」는 것은 그 자체는 아주 좋은 것이다.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는 하늘은 후련하고 상쾌하다. 그러나 그 쾌청 (快晴)도 일년 365일 계속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일년 내내 흐려 있는 하늘 밑과 마찬가지로 섬세한 신경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지 않을까. 쾌청의 가치는 비오는 날과의 대조에서 살아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렇게 회의의 구름 한 점 없이 밝기만한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이해」나「사랑」이 깃들 수 있을까. 어떻든 나는 매우 애매한 어조로 처녀의 섬세한 감각과 예술적인 소양과 풍미 있는 감정이입적인 사람됨을 이것저것 생각 나는대로 주워 설명해주면서 청년을 달래 돌려보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 pp.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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