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무것도, 전혀 숨기지 않고 쓰고 싶다. …이 평화 속에는 무엇인지 불길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스며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어머니는 행복을 가장하면서 나날이 쇠약해지시고, 또 나는 가슴속에 독사를 배어 어머니를 희생시키며 살찌고, 아무리 억누르고 억눌러도 살찌기만 한다. 아, 이것이 다만 계절의 탓이었으면 좋겠다. ---p.31
이제는 왕족도 귀족도 별것이 아니지만, 기왕에 망할 바에는 좀 더 화려하게 망하고 싶다. ---p.39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였던 것일까. 혁명을 동경한 일도 없었고, 사랑조차도 몰랐다. 오늘날까지 이 세상의 어른들은 이 혁명과 연애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전쟁 전에나 전쟁 중에도 우리는 그런 줄로만 믿고 있었는데, 패전 후 우리는 세상의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무엇이건 간에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의 반대쪽에 진짜로 사는 길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혁명이나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고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 너무나 좋은 것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심술궂게도 우리에게 파란 포도라고 거짓으로 가르쳐주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하여 태어났다는 것을. ---p.119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려오는 것을 이제나저제나 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속빈 쭉정이처럼 허무하게…….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너무나 참혹해서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하여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허망하게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참혹함이 지나쳤습니다. 태어나기를 잘했다고, 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뻐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