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는 마치 박주가리의 씨처럼 가벼웠다. 한없이 넓은 하늘에서 내려와 작은 풍경과 탑 위에 내려앉은 눈은, 그러니까 기막힌 인연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해도 할 수 없는 그런 인연의 줄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_88쪽
“이제 여기가 어딘지 알겠냐?” 고개를 끄덕였다, 옥자는. “어디냐?” “……세상 끝에 있는 정육점 같습니다. 고기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여긴 절간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냐?” “그냥 제 눈엔 자꾸만 그렇게 보여요.” “그래? 그럼 정육점 구경 잘 하고 가라.” 큰스님은 전나무 숲 사이로 뚫린 언덕길을 올라갔다. 옥자는 스님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스님, 제가 살았어요? 죽었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_175~176쪽
지하 곳곳에서 비명소리와 고함이 벽을 뚫고 건너왔다. 서러운 울음소리까지. 지하실의 구조는 단출했지만 살벌했다. 가운데에 놓인 탁자와 의자 두 개, 겉면에 타일을 붙여 만든 세면대와 그 옆 물이 고여 있는 좁은 탕, 배설물을 받아내는 데 쓰이는 양동이, 철제침대, 마지막으로 벽에 걸려 있는 각종 고문도구들. 창은 없고 오직 철문만 하나 있는데,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처럼 보였다. 천장 가운데에 매달린 백열등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이 고문실의 모든 걸 묵묵히 비춰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