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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게 길을 묻다

꽃에게 길을 묻다

조용호 | 북랩 | 2015년 03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6.0 리뷰 1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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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3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492g | 152*210*16mm
ISBN13 9791155854914
ISBN10 115585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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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조용호
소설가. 1961년 전북 좌두 들녘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신문학을 전공했다. 199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해 장편소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산문집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중남미 아프리카 문학기행』,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시인에게 길을 묻다』,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을 펴냈다. 무영문학상, 통영문학상을 수상했고 ≪세계일보≫에서 문학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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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봄은 기쁨이 아니다. 이 찬란한 빛깔의 바다에서도 그는 죽음을 떠올린다. 꽃을 피우기 전에, 이파리도 하나 내놓기 전에, 봄은 그의 누이를 소리 없이 꺾어갔으므로. 그에게 봄은 아프고 어둡지만 세상 사람들은 봄을 새로움, 어린 생명, 환한 것의 이미지들로 덧없이 채색한다. 봄과 죽음을 나란히 놓는다 한들 그들에게는 오히려 생명의 후광만 더 화려하게 부각될 뿐이다. 그러나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훌쩍 세상을 버린 기형도에게 봄은 죽음의 이미지가 압도했다. 어디를 가나 요란하게 봄 나팔을 불어대는 개나리는 그에게 철없고 속절없는 어린 것일 뿐이었다. --- p.55~56

대부분 자기 안에서 북받치는 설움 때문에 울겠지만, 자기 외의 사람이나 사물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해서 자주 우는 이도 있다. 히말라야에 왔던 여인 하나는 겉으로는 명랑해보였지만 유독 잘 울었다. 아마도 후자에 속하는 울보일 것이다. 울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무장해제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눈치보고 체면을 차리다 보면 울기도 쉽지 않다.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우는 울음은 더욱 그렇다. --- p.93

활짝 열어젖힌 작약의 몸에 벌 한 마리 날아와 간질이고 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당신이다. 당신을 위해 지난겨울 내내 차가운 흙 속에서 어둠을 견디었고 딱딱한 대지를 뚫고 솟아나 이제 겨우 꽃을 피웠다. 내 옆의 옆, 내 위의 위, 사방에서 당신을 유혹하는데도 세상 하나뿐인 ‘나’에게 찾아와줘 고맙다. 당신은 금방 내 품을 떠나 날아갈 테지만, 당신이 내 몸을 간질이는 이 순간 새 생명이 잉태되고 있다. 당신, 내가 왜 이리 붉은지 아는가. 해당화라는 내 벗은 당신을 유혹할 적들이 많지 않은 바닷가에서 피어나 나처럼 더 붉지 않아도 당신들을 초대할 수 있다. --- p.135

배롱나무 붉은 꽃에게 붉다는 표현은 어딘가 부당하다. 장미처럼 붉지 않고, 칸나 같은 핏빛이 아니다. 연분홍 다사로움, 자줏빛 은근한 정념도 없다. 빨강도 아니고 주황도 아니다. 귀기 어린 붉은빛이다. 느꺼운 빨강이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강가에 피어 있을 반투명 유리창 너머 흐릿한 분홍이다. 그 몽환적인 붉은 꽃은 여름을 지나 나락이 익는 가을까지 남도의 길가, 무덤과 사당, 절집 뜨락, 선비의 원림苑林에 질기게 피어 있다. 어쩌자고 무덤과 사당과 절집, 하필 선비의 정원에서 붉은가.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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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고 외로웠던 어느 날, 날 선 세상에 한없이 주눅 들었던 밤, 달빛 서늘한 창밑에 옹송그리고 앉아 책을 읽었다. 꽃은 사진 속에서 만개하고, 작가의 목소리에서 피어오른 향기는 두꺼운 스웨터를 뚫고 들어와 살갗을 어루만지며, 움츠린 등을 감싸 안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나는 오래오래 달빛 속에 앉아 있었다. 조용호의 문장은 언제나 내게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차원이었다. 적어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은. 그럼에도 질투조차 일지 않는 것은 행간마다 인장처럼 찍힌 그만의 정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꽃처럼 붉고 시처럼 뜨거운 위로 말이다.


정유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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