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으로 인한 사고지만 인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원전 사고는 도쿄전력,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범죄이자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점은 많은 시민들에게, 서로 돕기, 공동체 의식 등의 틀을 넘어서, 일본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새로운 ‘사회성’의 발견을 가져다주었다. 즉, 사람들에게 ‘사회’를 근본적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 2장 일본의 청년들이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53~54쪽
홈리스들의 집, 그리고 홈리스들의 삶을 통해 주거와 거주 일반의 문제로 물음을 넓혀 간 사카구치는 법률에 기반한 소유가 아닌, 소통과 증여에 기반한 주거/거주의 실천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금까지 근대 사회의 문제, 특히 생존권 같은 문제를 임금 노동을 보장하는 제도를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는 많이 있어 왔지만, 돈을 매개하지 않는 주거/거주의 관점에서 삶의 권리와 사회의 존재 양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의 문제 제기와 실천은 우리에게 관점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3장 길 위의 생활자에게 배우는 삶의 방식, 63쪽
카미타니 씨는 본 적도 이야기 나눈 적도 없는 사람과의 ‘새로운 만남’을 찾아 셰어하우스에 왔다. 가족의 대체로서 셰어하우스를 택한 경우와 달리 새로운 공동체 구축의 가능성이 보이는 부분이다. (……) 태어나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관계로부터 해방된 공간 가운데 혹은 대등한 관계성 가운데에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감, 안도감을 셰어하우스는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 4장 셰어하우스, 청년들의 더불어 살기 실험, 99~100쪽
프리타에서 니트로 와카모노론이 이동한 것은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는 일본 청년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떠넘기기 위함으로 보인다. 문화평론가인 구리하라 유이치로는 니트 문제를 개인의 속성 문제로 이해한 단적인 사례로 2005년도에 후생노동부가 조직한 ‘청년들의 인간력을 높이기 위한 국민회의’ 프로젝트를 지적한다. 즉 고용의 유연화에 따라 생긴 청년층의 고용 문제를 개인의 의욕 문제로 보려는 일종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 5장 니트론의 현재, 116~117쪽
원전을 둘러싼 문제점을 지적하면 할수록 그것은 근대사회, 국가 모순의 집합체임이 드러났다. 정치가나 관료, 거대 전력회사가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원전 사회는 후쿠시마 같은 힘없고 약한 지역을 희생시키는 체제이다. 식민지 정책에 의한 경제성장의 또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류 지향 = 강한 의욕’이라는 태도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름하에 힘없는 지역이나 사람들, 생물들을 마구 파괴시켜 온 것이다. 이에 비해, ‘하류 지향 = 의욕 없음’은 인간이나 자연을 위해서 ‘경쟁이 아니라 연대’, ‘파괴가 아니라 공생’을 추구하는 태도가 아닐까.
- 5장 니트론의 현재, 127~128쪽
‘하고 싶은 것’, ‘자기다움’이라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 그것도 다양한 세대, 다른 문화적 공간 속에 몸을 두는 데서 찾아진다. 자기다움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생들은 삶의 경험이 부족한 채로 자기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물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가까운 인간관계에서부터 취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퍼포먼스적인 관계성을 구축하지 않을 수 없다.
- 6장 획일성 속에서 추구하는 ‘개성’이라는 퍼포먼스, 161쪽
‘일을 하고 있는가/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노동의 유무를 기준으로 언설화된 남성 와카모노론과는 대조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와카모노론은, 젊은 여성들이 부모의 경제력에 기대 결혼도 하지 않고 우아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식의 젊은 여성 때리기로 언설화되었다. 이른바 ‘파라사이트 싱글’이다.
- 7장 곤카츠, 불가능의 언설, 172쪽
3.11 이후 가족 언설이 강조되는 배경에는, 이런저런 ‘연(?)’이 붕괴하고, 점점 개별화, 고립화되는 현실에서 관계성 회복에 대한 욕망을 지난날의 ‘가족의 끈’으로 치환하려는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 ‘가족의 끈’과 마찬가지로 곤카츠 언설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성세대가, 보다 정확히는 고도경제성장기의 중산 계층 남성들이 여성을 비롯한 청년 세대에게 곤카츠에 대한 욕망을 불어넣으려 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 7장 곤카츠, 불가능의 언설, 195쪽
후쿠시마 제1원전 터를 관광지화한다는 것은 원전에 대해 일반 시민에게 물어보는 것이며, 이것은 정보의 공개를 의미한다. 관광지는 특권을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드나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다양한 아이디어가 생겨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 9장 망각에 저항하라, 225~226쪽
원전의 위험성을 그다지 보도하려고 하지도 않고 ‘안전’, ‘안심’이라는 ‘내용에 관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허식적인 공식 발표’를 그냥 내보내는 매스미디어에 관한 비판은 항상 있고, 그것은 지금도 추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 압도적으로 ‘선의’, ‘선한 사회의 정립’으로 향해 있는 ‘탈원전의 물결’ 역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지적해야 한다. 원전을 계속 가동할 것을 주장하는 것도 폭력이지만, 단순히 그것을 멈출 것을 외치고, 지역 주민들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폭력이 되기 쉽다.
- 9장 망각에 저항하라, 240쪽
청년들의 목소리는 한편으론 와카모노론이라는 틀을 넘어서, 3.11 이후 기존 사회의 존재 방식의 한계를 깨닫고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초식남이라는 언어로도 대표되듯이 싸우기를 싫어하고, 동료들과의 연대를 확보해 나가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의 일본 사회가 기성세대에게 유리한 구조라면, 이들은 여기에 대해서 ‘청년들의 고용을 늘려라!’라는 식으로 분노를 발산하기보다는 기성세대를 놀라게 하고 흥분시킬 수 있는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과 아이디어를 대화의 장으로 가지고 나오려 한다. 이를 통해 기성세대로부터 경제적 자원을 투자하게 만들자는 발상도 내놓고 있다. 이렇게 청년 지식인들의 아이디어와 실천은 세대 간의 대화로 이어지고 있다.
- 8장 하위문화 속에서 발견한 ‘민의’, 215쪽
--- 본문 중에서